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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8-04 03:48
간도 분쟁은 국경분쟁이 아닌 영유권 분쟁이다
 글쓴이 : 관리자 (118.♡.32.39)
조회 : 838   추천 : 0   비추천 : 0  

1. 중국이 주장하는 고구려ㆍ발해시기의 한중국경선

1) 한중국경선이 고구려·발해의 南界라는 관점

이 說은 고구려ㆍ발해가 신라와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지점을 한중국경선으로 단정하였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학자들과 저서로는 장박천 등의 [동북역대강역사], 동동의 [중국동북사] 손옥량 등의 [고구려사] 양소전 등의 [중조변계사]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저서를 중심으로 고구려ㆍ발해와 中原의 관계 및 한중국경선을 고찰하겠다.

장박천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남북조시기에는 동북의 각 종족들이 모두 북위를 中原의 대국, 천부(天府)로 여겼으며 그의 封함을 받고 신민이 되었다(p.65). 북위가 공손 씨를 통일한 후 요동ㆍ요서ㆍ현도ㆍ낙랑ㆍ대방군을 설치하였다. 낙랑군은 조선현 등의 6현을 거느렸는데 지금의 대동강 南岸이다(pp.76∼78). 고구려는 남북조시기에 북위, 북제, 북주의 번부(藩部)로 취급받았으며, 일방적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北朝의 봉호를 받았다(p.93). 수ㆍ당 시기의 고구려는 그들의 속국이었다(p.120).

연의 진개가 조선을 공격하여 이천여리를 탈취하였는데 만번한(滿番汗)이 경계로서 지금의 압록강이다. 따라서 연은 이미 압록강 이서지역을 통일하였다(p.25). 그러므로 연과 조선의 경계는 패수인데 만번한과 패수는 모두 압록강의 하류를 지칭한다. 또한 한서 지리지의 함자현 주(注)에 "帶水西至帶方入海"라 하였는데 이 대수(帶水)를 지금의 한강으로, 대방현을 서울 부근으로 간주하였으며 함자(含資)를 지금의 충주와 강릉 사이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조령ㆍ소백산ㆍ태백산에 이르는 선이 낙랑군의 南界로, 태백산과 삼척에 이르는 선을 임둔군의 南界로 보았다 (pp.53∼54).

동동( 冬)도 고구려는 동북지구의 하나의 소수민족으로서 시종 중원정권의 통할하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p.584-585). 또한 만번한을 압록강 하류로 보았으며(p.165), B.C.30년의 낙랑군 북쪽 경계가 청천강에 이르렀으며, 후한 B.C.200년 전후해서 낙랑군의 위치를 황해도 해주부근으로, 대방군을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고당성으로 추정하였다(pp.328∼329).

손옥량도 고구려가 중원왕조에 대해 신하로 자칭하여 조공을 바치고 봉호를 요구하였으며(p.17), 중원왕조와의 예속관계를 철저히 벗어나지 못한 중국 북방의 할거정권의 하나였다고 보았다(p.93). 후한의 광무제가 낙랑을 수복하여 고구려와는 살수(청천강)로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또한 위서 고구려 전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최강성기 南界를 소해(한강 하구)로 보았다(pp.134∼136).

양소전도 연과 조선의 경계를 만번한으로 보았다. 그는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검토한 결과 만번한은 고패수(漢代패수)이며 이것은 조선의 대정강으로서 지금의 청천강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연과 조선의 경계는 청천강이 된다(pp.26∼27). 또한 兩漢시기의 패수는 청천강을 가리키며, 수성은 패수의 남에 위치하므로 응당히 지금의 청천강과 대동강의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p.29). 진 시기의 조선과의 경계는 전국시대와 같았다.

따라서 연의 장성 동쪽 끝이 지금의 평남 용강이며, 진의 장성 동쪽 끝은 조선의 수성갈석이라고 단정하였다(p.32). 그리고 양소전은 한사군의 위치도 모두 한반도 북부와 중부 및 남부의 일부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pp.39∼54). 또한 그는 부여와 고구려를 중원왕조에 예속된 중국 동북지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보았다(pp.61∼87).

그러므로 동진시기의 한중국경은 동진왕조에 예속된 고구려 지방정권과 한반도의 백제ㆍ신라의 경계선이 된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가 되는 한강과 신라와 경계를 이루는 실직(강원도 삼척)이 한중국경선이다. 남북조 시기에는 고구려의 장수왕 재임시기로 아산만ㆍ조령ㆍ죽령ㆍ평해를 잇는 선이었다(pp.88∼89).

수ㆍ당시기의 고구려는 중원왕조와 예속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인 서쪽의 한강, 동쪽의 이원ㆍ단천을 한중국경으로 보았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은 고구려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A.D.735년부터 당이 망한 A.D.906년까지 패강(대동강)이 한중국경선이었다(pp.90∼91). 이것은 성덕왕 34년(735년) 김의충(金義忠)이 당에서 귀국할 때 현종이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칙사하였기 때문이었다(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제8, 성덕왕 34년조).

발해도 당 왕조에 예속된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간주하여 신라와 경계를 이루는 니하(함남 용흥강)로서 한중국경선으로 보았다(pp.104∼106).

요ㆍ금시기의 한중국경은 고려와의 경계인 청천강 유역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겨란 정권(遼)은 중국 동북지역에 건립한 소수민족으로 보았으며 금을 세운 여진족도 중국 소수민족으로 간주하여 여진 각부가 거주하는 지역도 중국영토의 일부라는 주장을 하였다(pp.109∼116). 1130년(고려 仁宗 8년)에는 압록강 하구지역이 고려에 속하게 되어 이 지역이 金과의 국경이 되었다 (pp.116∼117).

원 초기의 고려와 국경선은 압록강 하류지역에서 설한령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그 후 西의 자비령에서 동의 철령 이남이 고려의 소속이 되었다. 원 말기의 고려의 국경선은 니성(창성), 정주, 함흥, 북청지역이었다(pp.121∼127). 명ㆍ청시기에는 압록강과 도문강(두만강)이 조선과의 국경하천이 되어 한중국경이 이후로 고정되었다(pp.132∼146).

이와 같은 중국의 논리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에 입각하여 동북공정에 참여하는 신진학자들에 이어져 다시 주장되고 있다.

2) 한중국경선이 고구려의 西界라는 관점

이 說은 고구려가 한국의 고대 국가라는 관점에서 주장하였다. 주요 학자들과 저서로는 범문란의 [중국통사], 전백찬의 [중국사강요] 上, 한국반의 [위진남북조사강], 박진석의 [조선간사], 유택화 등의 [중국고대사] 上 당장유 편의 [수당오대사], 그 외로 중국사회과학출판사가 발행한 [중국북방민족관계사](북경:1987), 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중국사고](북경:1982), 서연달 등의 [중국통사](상해:1986), 부낙성의 [중국통사](台北:1979) 등이다.

위의 저서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중원 국가에 예속된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즉 중원 국가들의 대외관계 또는 해외관계를 설명하면서 고구려를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학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객관적인 평가로서 우리의 주장과도 부합되기 때문에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 다만 위의 저서들의 출판년도가 늦어도 1980년대 후반 이전이며 대부분 중국의 동북지역이 아닌 북경이나 상해에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한중국경선이 고구려의 평양 천도(遷都)(AD 427년) 전후에 따라 다르다는 관점

이 說은 고구려의 평양 천도를 기준으로 하여, 천도 전(BC 37 - AD 427)은 고구려의 南界가, 천도 후(AD 427 - 668)는 고구려의 서북계가 한중국경선이라는 관점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천도 전은 중국 고대 소수민족 정권이며, 천도 후는 한국 고대국가라는 입장이다.

이 학설은 곽말약(郭沫若) 편의 [중국사고]에서 주장하였다. 또한 담기양(譚其 )도 이 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일사양용(一史兩用)이라 부르며, 일찍이 곽말약이 주장하여 한시기 중국학계를 풍미하였다.

곽말약은 주변 소수민족과 중원왕조와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북조시기에 중국 동북지역의 소수민족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부여가 망한 후 고구려가 이 지역의 정치적 중심역할을 하게 되어 새로운 소수민족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A.D.342년 모용황이 환도성을 침입하여 왕의 친척과 5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니 이에 고구려는 전연을 향해 칭신하고 조공하였으며, 다시 요동을 감히 침입하지 못하였다. A.D.352년 연왕 모용준은 고구려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군공으로 봉하였다.

A.D.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오래지 않아서 물길이 일어나서 부여를 멸망시키고 송화강 유역을 점령하니 고구려의 영토가 전에 비교하여 크게 축소되였다.

이것은 평양 천도 전의 고구려를 중원왕조에 예속된 소수민족으로 규정한 반면, 평양 천도 후의 고구려를 중원왕조에서 벗어난 국가로 간주하여 고구러의 영토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곽말약은 전에 비교하여 축소되었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도 최근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에 의해 완전히 수정되었다.

2. 중국이 최근 주장하는 고구려시기의 수정된 한중국경선

종래의 주장되어 온 "고구려는 중국에 예속되어, 한에서 당에 이르는 중원왕조 관할의 동북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는 관점을 수정하였다. 즉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 할거정권이며, 중국의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로 인식한다는 관점에서 수정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영토의 계승문제에 관하여 다음 세 가지 견해로 나누어진다.

가. 고구려 영역은 고조선의 고토였고 이곳은 한의 현도 혹은 진번의 관할 지역이었다. 따라서 고조선 역시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영역이 원래 중국에 속하였다.

나. 고구려는 고조선의 후국(侯國)으로 인식하였고 고구려의 영역이 원래 고조선이었다. 따라서 고조선은 지금의 조선의 고대국가이다

다. 고구려는 혼강 유역에서 나라를 세웠지만 오래 전 고이(高夷)가 탈출하여 와서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고이는 서주시기에 주의 천자가 선포한  주의 "북토"의 내에 거주하였다. 고구려 족과 고구려국은 모두 요동군 관할지나 후에 설치한 제2현도군 관할지에서 생겨났다. 후에 발전하여 한반도 북부에 이르고, 전성기에는 영역이 원래 한사군의 관할지였으며, 고구려가 중국고대 영토를 계승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위의 나항의 입장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영역은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역시 중국의 지방정권이므로 영역이 중국에 귀속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3. 한중국경 감계교섭(1712-1904) 및 간도협약 교섭과정(1907-1909)이후의 한중국경선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관점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의 귀속유무에 따라 한중국경선도 세 종류로 주장하였지만 양국간의 감계교섭 및 간도협약 교섭과정을 보는 관점은 다음과 같이 일치하고 있다.

한중 양국의 정권이 자주 바뀜에 따라 양국간의 국경이 변천되었다. 명초기에 한중의 국경은 압록, 도문강(一名 土門江, 豆滿江)이 된 이후 지금까지 양국간에 국경의 변화가 없었다. 압록강·도문강 중류 이하는 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양국간의 국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도문강의 강원(江源)에 이르는 상류는 여러 개의 하천이 있고 수심이 얕아 경계가 불명확하여 변민들이 불법으로 월경하여 분규가 일어났다. 1712년 양국 관리들이 답사하여 장백산의 분수령에 입비하였다. 1762년(청건륭 27년)에 청은 동북지역을 봉금정책을 실시하여 양국의 국민이 함부로 월경하는 것을 막았다.

1871년(청 동치 10년) 청은 봉금정책을 폐지하고 이민정책을 실시하였다. 1882년에 월경점간한 조선인의 쇄환문제가 일어났으며 이듬해 조선정부는 오히려 중국 연변지역의 해란강이 토문강이라 주장하여 토문강 이남이 조선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즉 도문강 이북 토문강(실제는 해란강) 이남의 연변지역이 조선영토라는 것이다. 1885년 6월 조선정부는 토문·두만 양강설을 주장하여 쌍방감계를 요청하였다.


양국간의 1차 감계(1885.9.30-11.29)의 주요 논쟁점은 2가지 이었다. 하나는 토문, 두만, 도문강이 하나의 강(중국측 주장)이라는 것과 토문, 두만(도문)강이 서로 다른 강이라는 조선의 주장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 강의 정원을 홍단수로 보는 중국 측과 홍토수로 보는 조선의 주장이 대립되었다.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하고 1차 감계는 결렬되었다. 2차 감계(1887.4.7-5.19)에서 조선은 1차 감계 때 주장한 토문, 두만 양강설의 착오를 정식으로 인정하였으며, 따라서 양국은 토문, 두만, 도문강이 하나의 강이면서 음이 다르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여 도문강으로서 양국의 국경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무산 이동의 강류는 계한이 분명하나 강의 상류인 석을수·홍토수 합류처 이상의 강의 정원(正源)에 대하여 문제가 되었다.

중국 측은 홍단수를 주장하다가 양보하여 석을수로 주장한 반면 조선은 홍토수가 강의 正源임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2차 감계도 최종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1888년 1월 이홍장이 조선정부에 양국의 파원감계를 요청하였지만 조선은 거부하였다. 같은 해 1월 조선정부도 청이 도문강의 正源을 석을수로 보는 관점에 반대하며, 다시 홍토수가 강의 正源임을 밝혀 이 강으로서 국계를 정할 것을 청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 후 조선정부도 2차 감계안을 모두 불승인하고 다시 파원 감계할 것을 청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정부에 재차 협상을 요구하여 중조감계 문제를 원만히 타결 지어 이에 대한 최종 해결을 보려고 하였으나 그의 실각으로 청제에게 품신도 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후 조선은 중조변계 논의가 있었지만 재차 토문, 두만(도문)의 양강설을 주장하였다. 더구나 조선인이 개척한 도문강 北岸은 반드시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파견하였으며, 한·청인 간에 충돌이 심화되자 1904년 7월 13일 양국 변계관리들 간에 [한중변계선후장정]이 약정되었다. 이 해에 조선정부는 청에 감계논의를 제의하였으며 청도 2차에 걸쳐 조선정부에 파원감계를 요구하였지만 일본은 청에 노일전쟁 후에 양국의 감계문제를 논의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간도 한인들을 보호하는 구실로 사이또(齊藤季治郞)중좌 일행 61명을 1907년 8월 19일 간도에 파견하였으며 8월 23일 용정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개청하였다. 이에 청·일 양국간에 간도 문제에 대한 논의가 1909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2년의 교섭을 거쳐 청은 '동삼성육안'에 대하여 중대한 양보를 함으로써, 또한 청의 권익을 대거 상실하는 조건하에 1909년 9월 4일 [도문강중한계무조관](즉 간도협약)과 [동삼성교섭오안조관]이 청일 간에 체결되었다.

이 두 조약은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진일보한 확대였다. 또한 중국주권에 대한 침범이었다. 즉 [도문강중한계무조관] 중 일본이 도문강을 한중의 국계로, 도문강의 북안을 중국영토로 승인하였지만 도문강은 본래 한중간의 국경하천이였으며 도문강 북안은 중국영토였다. 일본은 이 조항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다른 각 조항의 특권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일본은 [동삼성오안]의 특권을 취득하였다. [도문강중한계무조관] 제1항은 "도문강으로서 한중 양국의 국계로 하며 그 강원은 정계비로부터 석을수에 이르는 선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중국으로 하여금 적지 않는 영토를 상실토록 하였다. 왜냐하면 본래 도문강의 正源은 홍단수였는데 1887년 2차 감계 시에 중국 감계대표가 조선 측과 타협하기 위하여 석을수로 양보·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위의 [간도협약]으로 한중간의 장기적인 국계논쟁이 이와 같이 終結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학자들은 명의 초기부터 1712년 이후 압록·도문(두만)강으로 한중국경선이 결정되어 지금까지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Ⅵ. 중국의 한중국경론에 대한 비판

1. 중국의 고구려 발해시기의 한중국경선 주장에 대한 비판

중국학자들이 고구려·발해의 남계를 한중국경선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고구려족과 발해족의 원류는 다르나 이들 국가가 망한 후 대부분 한족화되였다는 관점이다. 둘째, 고구려와 발해가 중원왕조에 예속된 소수 민족국가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는 한인들이 왜곡시킨 사료에 근거하여 그들의 논리를 전개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들의 역사 인식은 중국 중심사관인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저술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첫째의 고구려·발해족이 국가가 망한 후 대부분 한족화되었다는 주장은 손진기가 처음 내세우고 있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으며, 또한 예맥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있으나 손진기는 고구려족을 형성하는 족원으로 부여족, 옥저족, 예족, 맥족, 한족, 한반도의 고조선인과 백제인을 들고 있다. 또한 그는 고구려민족은 고구려가 존재하는 기간동안 여러 족들을 흡수하여 장대해졌으나 고구려가 멸망하자 각족 사람들은 고구려민족으로 융화되지 못하였으니 고구려 국민과 고구려족은 서로 다른 두 개념을 내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통치하의 한족들은 결코 모두가 고구려에 융화되지 못하였으며, 최초에 고구려에 들어가 융화된 부여인을 제외하고는 5세기경에 편입된 부여인은 고구려족으로 완전 융화되지 않았다. 숙신계도 언어·종족·경제·문화의 차이가 비교적 커서 고구려족에게 융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손진기는 고구려 민족의 주류는 오늘날의 한족으로 화했으며, 발해가 망한 후에는 발해에 융화되었던 고구려인들의 遼·금에 의해 서쪽으로 이동, 차례로 동몽고·요동을 거쳐 산동으로 옮겨졌다가 최후에 대부분 한족에 동화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한족도 고구려족의 형성에 하나의 중요한 족원으로 삼고 있으며 숙신계는 비교적 고구려족에 융합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 민족의 주류는 한족화 되었다는 손진기의 논리 전개에 있어서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한 왕건군은 고구려의 원류를 부여의 한 갈래이나 예맥으로 보지 않고 있다. 고구려를 예맥족이라고 한 것은 '한서·왕망전'의 착오적인 이해에서 일어난 것이며, 예맥의 거주지는 한반도 중·동부로 간주하였다. 부여는 숙신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기 때문에, 고구려인도 응당 숙신인이며 여진족과 동일한 족속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와 발해가 존재했던 중국 동북지역은 동방족(동이)의 후예가 살았던 것이므로 한족의 족원인 화하족과는 거리가 멀다. 동방족의 고장은 그 시원부터가 남북만주, 한반도, 연해주, 몽고지방이다. 그러므로 송화강 유역에서 만리장성 이동은 복희氏에서 진개의 난(B.C.4000-280)에 이르기까지 서방족(夏·漢族)이 진출하지 못한 곳이다. 더구나 夏代 이전의 산동지역에는 특징적인 문화가 존재하였으며 夏代 이후에는 동이부족이 활동하였음이 청동기 유물로 통해 입증되고 있다. 이 지역에 있었던 춘추시대  國문화의 연원이 동이문화에서 유래되고, 후에 노의 문화로 동점하였다. 중국의 고문헌은 동방족의 국가를 숙신씨라 칭하였으며, 10여 갈래의 이름으로서 만주·중국본토를 무대로 하여 활동하는 동방족 중 숙신·동이·동호 등은 조선족과 같은 뿌리 같은 조상의 겨레이다. 숙신(朝鮮)에서 發한 읍루는 그 후 물길·말갈·요·금·여진 등으로 바꾸어지며 이것은 단군조선의 후예와 그 지족들이 동북 만주지역에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다. 리지린도 숙신을 B.C. 12세기 전후시기 고조선족의 명칭으로 보았다.

그리고 손진기가 주장하는, 고구려족을 형성한 족원에 대하여 그들의 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반고와 사마천은 예와 맥을 두 개의 종족으로 구별하여 보았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연 혈연적 관계가 없는 별개의 종족이 아닌 동일한 종족의 두 갈래이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예족은 고조선족이며 거주지역은 하북성에서부터 요서·요동 일대와 송화강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부여는 고대 조선인 자신들의 이두식 기명이며 예는 한식기명이다. 즉 부여를 漢音으로 전환시켜 [후이] (濊)를 改寫한 것이다. 따라서 예인은 고조선족의 통칭이다. 고구려는 貊의 국가이며 부여왕계와 그 왕계가 동일하니 고구려는 夫餘 왕계의 본계인 [탁리국](고리국)과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명칭은 고리( 離)와 관계가 있다.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동호를 격파한 흉노가 예, 맥, 조선과 인접하였다고 썼는 바 이 맥은 동천하여 예지에 거주한 부여나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옥저인도 예인이었다. 부여는 맥족이 고조선족 즉 예인의 나라인 [不與]에 건국한 국가이며 그것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으로서 貊國 즉 고리국의 문화를 주체로 하고 거기에 고조선의 문화를 계승하였다.
발해에 대해서도 중국학자들은 말갈을 주체민족으로 간주하여 중원왕조와 예속관계인 변방정권으로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부랑운(傅郞雲)은 발해를 중국의 지방민족정권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족이 숙신족 뒤에 출현했다고 하였다. 손진기도 발해는 중국의 하나의 지방자치 정권으로서, 주체민족은 발해족이라고 하여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내었다. 더구나 발해가 망한 후 대부분 발해족은 한족화되어 여진족에 가입한 수는 적었기 때문에 여진족이 발해족을 계승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인이 세운 우리 민족국가임이 틀림이 없다. 구당서에서도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라 하였듯이 북한에서도 발해가 주민, 영역, 주권의 모든면에서 고구려를 계승 발전시켰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고대 우리민족과 고구려족의 족원의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발해가 망해서도 그 유민들이 한족화되지 않고 동이문화의 계승국가인 요·금·청에 의해 민족성이 유지되어왔다. 설혹 그들의 주장되로 그 유민들이 한족화되었다 하더라도 당시 고구려·발해민족은 엄연히 한족과 다른 동이족(朝鮮族)의 후예인데 같은 민족인 신라와의 경계를 한중국경선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궤변이다.

둘째 이유인 고구려와 발해가 중원왕조에 예속된 소수민족국가라는 관점은 1980년대 이후 중국학자들이 제기한 이론이다. 전술한 장박천, 동동, 손옥량, 양소전 등 외에도 경철화는 고구려가 중국의 중원정권에 대한 지방정권의 성질을 지닌 북방 소수민족이며, 중원국가와는 신속(臣屬)·조공·통혼 등의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으로 간주하는 중국학자들의 주장도 대부분 1980년대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이론은 조공과 책봉이라는 교섭형태에서 한 중관계를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의 對중국관계를 조공과 책봉이라고 기재된 史料의 해석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은 그 관계의 성격이나 내용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고대사가 갖는 사료적 제약, 즉 한국사에 있어서 당대 사료의 부족과 화이관에 입각하여 윤색된 중국사서의 기술태도 때문에 기인하는 바가 큰 것이다. 특히 남북조시대의 조공관계는 중국이 종속관계를 전제로 外夷를 견제하고 臣屬시킨다는 본래의 정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에서 중국의 모든 사서에 주변국가의 對中國使行을 획일적으로 조공으로 기록한 것은 중화주의적 筆法에서 말미암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남북조시기는 중국이 주변민족을 충분히 제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 시기의 남조와 북조의 관계는 수평관계를 전제로 한 교빙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중원왕조와의 관계를 조공과 책봉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수 없다.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재검토와 당시 동북아의 국제정치상황 및 문화수준, 군사력 등을 파악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남북조시대의 중원의 諸國家들의 통치기간을 보면 西晋이 53년, 東晋이 104년, 宋이 60년, 齊가 34년, 梁이 56년, 陳이 33년이며 北魏가 149년이다. 존속기간이 30년 미만의 국가로는 東魏(17년), 北齊(28년), 西魏(22년), 北周(25년)이며 隋가 37년이다.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이후부터 수양제가 등장할 때까지(400-603) 200년간은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더구나 북위는 광개토대왕의 토벌로 130여 년간 고구려의 복속국이 되었으며, 장수왕 때는 고구려의 정략 결혼정책에 의하여 고구려의 사위국( 國)이 되었다. 이와 같이 지배기간이 짧은 중원의 諸국가들이 900년 역사의 고구려를 예속시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229년간이나 존속하였으며, 武王 13년(732년)에 장문휴가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자사 韋俊을 공격하였다. 당시 발해는 국제적 환경인 거란 및 돌궐과 당의 대립을 이용하여 당을 공격하였다. 이미 730년에 발해는 거란·돌궐 등과 연합하여 당의 북진정책에 대비하고 있었다. 발해의 唐 공격을 지원한 세력은 돌궐·거란·해가 있었다. 당은 돌궐 중심의 대당 연합세력이 약화되었을 때는 혼인정책으로 동북 여러 주들을 회유하고 군사적 정벌을 통해 북진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발해는 돌궐세력이 약했을 때는 당에 접근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 영토회복을 위한 주변지역에 대한 병합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신라는 발해의 이러한 남진정책에 맞서 강릉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당시의 발해는 신라와 남북국시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武王 때에 이르러 말갈을 정복하는 등 고구려 故地를 다 회복하여 국토를 크게 넓혔다. 즉 흑수말갈의 땅을 흡수하여 흑룡강이남, 남북만주 전부, 연해주 일대 및 대동강과 용흥강 이북의 땅을 탈환하였다. 이에 신당서 발해전은 이것을 "지방이 5천리로, 부여 옥저 변한 조선 해북의 諸國을 모조리 얻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왕 때에 해동성국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거에서 고구려 발해는 중원왕조의 변속국가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발해의 南界가 한중국경선이 될 수 없다.

또한 양소전은 요 금시기의 한중국경선을 고려와의 경계로 간주하였지만 요 금은 중국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차지한 지역이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동이족의 영토라고 규정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郭沫若의 고구려의 평양 천도 전후의 한중국경선 구분은 비판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2. 중국의 고구려시기 전의 한중국경선 주장에 대한 비판

우리 古代史에 있어서 논쟁이 첨예했던 부분이 漢四郡의 위치문제일 것이다.  대부분의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추정하였다. 이와 더불어 나타나는 고대 지명에 대한 오류문제이다. 장박천, 동동, 손옥량, 양소전 등은 낙랑군, 遂成, 滿番汗, 浿水, 薩水, 含資縣, 帶方郡 등의 위치를 왜곡된 중국사서에 의거 한반도내로 잘못 추정하였다.

韓·中·日의 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당 고종이 고구려를 점령한 후 한반도의 주요 지명을 정략적으로 중국의 지명과 동일하게 만들어 놓은 까닭으로 중대한 오류에 빠져 있다. 漢四郡地는 위만조선의 강역이다. 사기 조선열전의 진번군은 "故眞番 朝鮮胡國"이라고 應 가 밝힌 곳으로 지금의 남만주 광녕의 남부지방이다. 임둔군은 요동반도 南端部 지역이다. 현도군은 요동반도 동부해안이 원위치였지만 조선족의 공세에 밀려 진번·현도 양군을 포기하고 현도군을 광녕의 고구려현지로 옮겼다. 漢이 설치한 낙랑군 東部都尉는 동옥저지역이며 즉 玄 郡地이다. 후한서, 위서에 나오는 단단대령은 요동반도 천산산맥이다.
낙랑군의 위치문제가 지금까지 가장 많은 억측과 오류를 자아내게 하였다. 漢人들은 조선어의 [樂浪]의 의미가 국가라는 보통명사인 것을 모르고 고유명사로서 해석하였다. 최초의 樂浪은 漢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조선고토에 한사군중의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낙랑군은 요하를 중심으로 동서의 양 지역으로 나누며 동부낙랑은 요동반도의 구옥저지역으로 嶺東7縣이라고도 하였다. 서부낙랑은 산해관 以西의 난하 유역이며 은 주시대의 고죽국지, 한초의 위만조선 왕검성의 소재지로서 낙랑군의 중심 지대였다.

그러므로 중국학자들이 한반도내로 언급한 낙랑군과 한사군의 위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와 같이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착오는 浿水에 대한 無知에서 비롯되었다. 漢代 이후로 漢人들은 한 중의 국경선이 되는 강을 浿水라 호칭하였으며, 이러한 浿水는 난하, 대능하, 遼河, 대동강이 있다. 난하가 浿水라는 것은 漢과 고조선의 국경선이었기 때문이다. 대능하가 浿水가 된 것은 후한의 盛世와 요동군의 팽창으로 난하의 浿水가 대능하로 옮겨졌던 것이다. 遼河가 浿水가 된 것은 공손 강이 요하 동쪽의 지방을 차지하여 치소를 요양지방에 옮겨 대능하 - 요하를 大遼河로 옮김으로써 遼河의 浿水가 나타난 것이다. 대동강이 浿水로 변화한 것은 唐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북의 땅을 모두 차지한 후 평양을 낙랑, 대동강을 浿水, 압록강을 염난수, 동가강을 馬 水를 고치고 한반도 내의 지명을 중국의 지명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括地志가 처음으로 "高麗郡平壤城 本漢樂浪郡 王險城"이라 기록하였다.

따라서 장박천이 압록강을 浿水로 본 것이나 양소전이 청천강을 浿水로 본 것은 큰 착각이었다. 또한 장박천이 압록강 하류지역으로 본 만번한은 서한과 고조선의 국경이었던 浿水인 난하의 동부 연안에 있었다. 또한 그가 한강으로 추정한 帶水는 小凌河이며, 충주와 강릉 사이에 있다고 한 含資縣은 소능하 하류지역이며, 서울 부근으로 본 帶方縣은 소능하 중류지역으로서 帶方發祥地이다. 이것은 임진강(帶水)과 예성강(浿江)이 중심이 된 한반도 중부지방의 帶方國(B.C. 100-50)을 잘못 혼동하였다.

동동이 황해도 부근으로 추정한 낙랑군과 대방군의 근거는 소위 樂浪遺蹟이라고 말하는 唐土域의 유적과 고분군, 張撫夷의 墓塼을 1912년 황해도 사리원 남방에서 일본인이 발견한 것에 기인한 것 같다. 그러나 漢人의 고분군 등을 종합할 때 그 유적은 전부가 고구려 美川王시대를 전후한 유적이다. 이것은 일본침략주의사가들이 평양을 漢代樂浪郡地로 조작하기 위한 증거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손옥량이 후한의 광무제가 낙랑을 수복하여 薩水로 고구려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고 하면서 薩水를 청천강으로 추정한 것은 큰 착오이다. 광무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낙랑을 토벌한 것은 대무신왕 24년의 사건이며 "光武帝遣使伐樂浪…薩水以南屬漢"이라는 三國史記 本紀에 근거하여 孫玉良이 단언한 것으로 보이나 중국사적엔 이 기록이 없다. 여기에 薩水는 요동반도의 州南河(古名은 淸河, 沙河)이다. 그러므로 후한 광무제시기의 고구려와의 국경선은 요동반도 州南河이다.

양소전은 遂成을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지역으로 보았으며 연의 장성 끝을 평남 龍岡으로, 진의 장성 끝은 조선의 수성현 碣石으로 추정한 것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낙랑군에 遂成縣이 있고, 遂成縣에 碣石山이 있어, 이 碣石山이 만리장성의 동남쪽 기점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중국학자들이 주장한 당시의 한중국경선은 한반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왜곡된 사료에 의하거나, 자의로 진실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저술을 남겨 후세에 또 하나 왜곡된 증거를 남기려고 한 것이다. 즉 古代로부터 우리의 領土에 대한 축소작업인 것이다.

3. 명 초기이후 압록 두만강이 한중국경선이라는 중국 측의 한중국경론 비판

이 說은 1909년 3월 伊集院 일본공사와 曹汝霖 참의 간에 오고 간 교섭내용에도 중국 측이 주장한 내용이다.

본래 백두산 일대의 두만강지역은 원 이후 발해여진 소속이었으며 다 중국에 羈 하였다. 明初부터 조선의 王이 강남에 있어 중국과 江으로 경계하여 두만강 북의 영토주권이 조선과 관계없다는 것이 당시 청의 주장이었다.

특히 吳祿貞은 고려가 원대 이후로 압록ㆍ도문 兩江의 남쪽에 있었으며 明ㆍ淸代에는 모두 속국이 되어 조선의 병력이 도문강을 한 걸음도 넘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연길청이 간도라는 것은 허황된 것이라는 것이다(延吉邊務報告, 제1장 結論).

그러나 명조 초에도 고려는 尹瓘이 구축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임을 주장하였으며, 이성계는 동북경략에 힘썼다. 즉 1382년 李豆蘭을 보내어 여진 각부를 정복하였으며 1391년에는 李必을 보내어 그들을 초무하였다. 세종시기 두만강의 6진을 개척할 당시의 조선의 강역이 두만강을 넘지 않은 것 같으나 江外의 女眞은 거의 다 내부한 상태였고 江內에도 잡거하여 훈춘하, 애하, 포이합통하, 해란하의 諸유역을 타국의 영토로 보지 않았다. 이것은 명조의 세력이 선덕 말년 이후 차츰 여진지방에서 쇠퇴하여(1449년 경) 동북지역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민왕은 元 明의 교체기에 명이 고구려의 고토인 요양 심양 일대를 점유하지 않은 허점을 이용하여 잃었던 북방영토 회복을 추진하였다. 1356년 압록강을 건너 8站과 3站을 공략하였으며, 1370년 1월에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遼陽 潘陽地域)를 정벌토록 하여 우라산성을 함락시키고 그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그 해 11월 지용수 이성계 등은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지용수는 남합출과 야선불화 등에게 "본국은 주무왕 때부터 대대로 서의 요하에 이르기까지 강역을 지켜 왔고, 元이 통일한 이후 공주를 고려에 시집가게 하여 심 요지역을 공주의 湯水地로 하였다"고 말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고려는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동녕부에 문서를 보내어 "심 요지역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 라고 통고하였다. 북원(몽고)도 1371년 윤3월에 요양성 평장 劉益과 우승 王哈刺不花 등이 明에 항복할 시에 '심·요지역'이 고려의 땅임을 시인하였으며, 동년 4월에 明 태조가 요양성을 군대의 지휘소로 삼았음을 고려에 통고해 오자 이듬해 3월 고려는 '동녕과 요양은 일찍이 明에 귀속한 바가 없는 곳임'을 문서로 항의하여 이곳이 우리의 땅이라는 것을 통고한 것이다.

또한 압록 두만 以北지역을 강도회맹(1627)으로 조·청간에 봉금하기 전에는 청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오히려 조선의 국경이 봉황성의 동쪽에 있었다고 佛人 De Halde의[Description de la Chine]에 설명하고 있다고 하였다. 영조 7년 초하·애하 합류지에 수로방신(水路防迅)을 설치하는 일과 영조 22년 청의 관병을 첨주·방수하는 일 등이 조선의 항의로 폐지되었다.

나이또(內藤虎次郞)도 [포이합도하연안고적도설]에서 성자산 부근의 석채와 토루 및 석비에 의거 조·청 양국의 국경이 포이합도하 부근으로 추정하였으며, 간도지방에 韓人이 거주하였던 것은 심히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며 소위 월간에 즈음하여 시작한 것이 아니 다고 하였다. 더구나 조선근해의 경호권도 조선이 행사하였으며 압록강 도선장 관할도 조선에서 하여 봉금지역인 무인지대의 실제 관할권이 조선에 소속되었다.

1902년에는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임명하여 호구 및 재산을 조사하였으며, 그 후 그는 사포대를 조직하여 간도한민을 보호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1897년 서상무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하였으며, 1900년 경 평북관찰사 이도재는 압록강 북안지역을 각 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하여 서간도한민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백두산 일대의 대한 역사적 유적과 사실들을 종합할 때 淸의 세력은 이곳까지 미치지 못한 반면에 한국의 세력범위가 압록 두만강밖에 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明 초기부터 압록·두만강으로 국경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상 실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Ⅶ. 동북공정과 간도영유권의 문제

1. 동북공정과 조선족 동포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목적은 간도분쟁 재발의 방지와 간도영유권의 확보에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간도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에 대한 역사적,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가 대두되어 진다. 결국 동북공정도 조선족 동포의 문제로 귀결된다.

국가의 구성 요소로는 인구, 영토, 정부를 들고 있으며 국가란 인간의 사회적 조직체이므로 국가의 인구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주민이 하나도 없는 국가란 상상할 수 없다. 주민이 다 떠나버린면 국가는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유태 민족이 사방으로 흩어진 예는 유명하다. 이와 같이 국가가 성립하려면 人的 요소가 필요하다. 국가의 人的 요소는 보통 국민이라고 부르는 데 그 구성원들은 국가와 국적이라는 연결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국적은 국가의 人的 요소를 이루는 개인과 국가간의 연결 내지 결속인 동시에 국가 人的 관할권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현 조선족자치주의 구성 요소이다. 그러나 자치주의 조선족 비율의 감소는 자치정부의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온 주권 발현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이 점이 장래 간도영유권 주장의 장애 요소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간도지역은 국제법상 무효 조약인 1909년의 간도협약에 의거 일본이 중국에 불법적으로 할양한 지역이다. 또한 할양은 할양지 주민의 투표를 조건으로 하는 예도 있다. 주민의 희망이 곧 그 지역의 귀속을 정하는 것도 아니고 주민의 일반투표가 국제법상 확립된 일반 원칙도 아니나 주민 의사를 존중한다는 민주적 배려에 말미암은 것이다. 프랑스 헌법(제27조)처럼 "영토의 여하한 양도, 교환, 부가도 관계 인민의 동의가 없으면 유효치 않다"고 명시한 예도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족은 대부분 1948년 이전에 중국 국적을 강제로 취득케 하여 우리 국적을 상실토록 하였지만, 우리 국적법 상으로는 이중국적자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최근 중국 정부의 조선족자치주에 대한 조선족 수를 전체의 30% 선으로 낮추기 위하여 실시하려는 非조선족 유입정책과 조선족의 이주정책은 국제법상 소수민족 보호 정책에 위배된다. 소수민족이 보호받는 권리는 매우 광범위하며 국적의 권리, 모국어 사용권, 종교의 자유, 모국어 교육의 권리, 다수 민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즉 차별을 받지 말아야 할 권리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소수민족이 국제법상 마땅히 보호되어야 함에도 중국에서 조선족이 받고 있는 차별대우와 동화정책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었다. 결국 이제는 중국이 이들 조선족을 중국인으로 만들기 위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것이다. 정부는 조선족정책을 이러한 관점에서 장기적이고 국가 안보 차원에서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통일 한국이 될 경우 중국과의 관계가 현재의 우호 관계에서 상호 경쟁 및 적대 관계로 발전할 것임이 틀림없다. 특히 중국과의 영토분쟁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간도지역에 있어서 조선족의 역할은 우리 민족에겐 대단히 중요하다. 첫째, 앞으로 국경 개념이 희박해진다 하더라도 간도지역에 중국인 보다 더 많은 우리 조선족이 거주하여야만 그곳이 장래 우리의 영토가 될 수가 있다. 즉 중국이 불법적으로 간도지역을 점거하고 있더라도 실지적인 영토의 주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상 간도지역은 우리 민족이 최초의 국가를 세운 곳이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문화유산과 민족의식을 그들이 보존·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역사적으로 평화적인 주권발현을 조선족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영토분쟁이나 민족분쟁 지역에선 그 지역 주민의 투표에 의하여 귀속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캐나다의 퀘벡주 분리 독립운동이 주민 투표에 의해 부결된 경우는 좋은 예다. 그러므로 조선족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려야 할뿐만 아니라 본국과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연대 관계를 수립하여야 한다. 만약 중국과 간도영유권 분쟁이 재연 될 경우 조선족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 후손들의 미래 사회에 있어서도 조선족은 매우 중요하다. 장래 우리 민족은 좁은 한반도에서 모두 살아갈 수가 없다. 언제 가는 세계 각국으로 이주하여야 할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 시기에는 만주지역이나 연해주 특히 간도지역은 우리 후손들이 쉽게 이주할 수 있는 지역으로 대두되어질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우리말과 우리의 고유한 풍속을 잃지 않고 생활하고 있는 동포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정착하는 것보다는 쉽게 적응할 수가 있으며 조선족들과 함께 같은 민족의식을 공유한 채 살아갈 것이다. 즉 장래 우리 민족의 생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족은 절대 필요하다.

넷째,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에 대응할 가강 적절한 전략은 조선족에 대한 정책을 새로 수립하는 것과 동시에 중국에 대하여 간도영유권의 선포에 있다.

다섯째, 간도지역은 동북아시아의 심장부 지역이다.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로서 우리 민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이다. 따라서 간도지역을 확보하여야 동북아시아를 제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가치와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조선족의 가치는 오히려 중국으로 볼 때 눈의 가시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간도영유권 분쟁의 실상

1) 간도 분쟁은 국경분쟁이 아닌 영유권 분쟁이다

일반적으로 간도분쟁은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을 둘러싼 국경분쟁인 법률적 분쟁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분쟁의 실상은 백두산 일대의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임과 동시에 정치적 분쟁이다. 따라서 간도분쟁의 핵심지역인 간도영유권의 범위 규정이 선결 문제이다. 대개 두만강·압록강 대안을 동·서간도라 일컬어 왔다. 이 간도에서 우리의 주권이 발현되면서 시간이 지남에 간도의 개념은 봉금지역으로 더욱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발단은 양국이 봉금한 지역이, 우리 민족의 고토라는 정체성도 작용하였다. 이 봉금지대의 범위는 '천하대총일람지도'와 '해룡현지'에 의해 추정하면 유조변책 밖에 있는 지역으로 봉황성에서 북쪽으로 심양 부근을 거쳐 개원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북동쪽으로 길림시의 송화강과 흑룡강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백두산을 에워 산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이 봉금되자 연해주도 자연 봉금되어 무인지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청은 러시아의 강박에 의해 1860년 북경조약을 맺고 봉금되어 온 민족의 고토인 연해주를 러시아에 불법 할양하였으며, 당시 조선은 조약체결 사실도 몰랐다. 그러므로 간도분쟁은 백두산정계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한·중 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도분쟁은 봉금지역인 무인지대를 둘러 산 영유권 분쟁임과 동시에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개입된 정치적 분쟁이다.

2차에 걸친 한·청 국경회담과 1909년 일·청간의 간도협약 체결 과정에 나타난 논쟁점을 분석하면 간도분쟁을 국경분쟁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점을 열거하면, 첫째, 백두산정계비의 가치, 둘째, 비문 내용의 해석, 즉 토문강의 실체, 셋째, 을유, 정해 국경회담의 효력, 넷째, 1885년 이후의 교섭서 및 선후장정에 대한 견해, 다섯째, 역사상의 사실에 관한 쟁점이다. 한국과 일본은 정계비를 인정하고 토문강이 송화강의 원류로 보았으며, 청은 정계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았다. 한·일은 2차의 국경회담이 모두 무효로 간주한 반면, 청은 두만강 상류 2백 여리만 미정일 뿐 나머지 두만강은 국경이 획정되었다는 관점이다. 결국 이러한 쟁점들도 일본의 책략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고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1712년 목극등에 의해 세워진 백두산정계비를 조약으로 하는 국경분쟁으로만 간주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즉 백두산정계비 건립과정에 나타난 국제법상의 하자(瑕疵)는 다음과 같다.

문서에 의한 합의가 아니며, 정계비 건립시 조선의 대표인 박권과 이선부를 억압하여 백두산의 동행을 거부한 채, 조선의 대표 대신 군관인 이의복과 조태상 등을 동행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비문에는 조선의 조약 체결당사자인 박권, 이선부의 성명과 서명, 낙인이 없다. 이것은 강희제의 독단과 목극등의 강박에 의해 임의대로 정계비를 설치하였으며, 당시 실질적인 조·청의 국경선이 반영되지 않는 법률적 착오 등의 국제법상 조약의 성립조건에 문제점이 발생한다. 따라서 백두산정계비를 국경조약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도 을유·정해 감계회담 때부터 백두산정계비를 심시비(審視碑)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백두산정계비를 부정하는 대표적 학자는 오록정(吳祿貞), 왕숭시(王崇時), 서덕원(徐德源) 등이다. 왕숭시는 목극등의 감계는 청의 일방적인 변경시찰에 불과하여 정계비의 성격이 없다고 평가하였고, 서덕원은 조·중 양국이 공동으로 설립한 정계비가 아니라 목극등이 압록·두만강의 수원을 심시한 표지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로 정계비 건립시 양국 간의 공식적인 담판기록이 결여되고, 비석에 대청(大淸)이란 청의 국명만 있고 조선이란 국명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에 비해 양소전, 장존무는 사실상의 정계비로 간주하고 있다. 여하튼 백두산정계비가 한·중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압록·두만강은 실질적 국경이 아니었다

정계비 건립을 전후한 실질적인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Du Halde의 지도 중 레지의 비망록에는 "봉황성의 동쪽에 조선국의 국경이 있다"고 하였으며, '달단중화전도' 중 '조선왕국지도(Kaoli Koue ou Royaume de Cor e)에 평안(PING-NGAN)의 영문자가 압록강 대안의 변책선까지 표시되어 있다. 나이또(內藤虎次郞)는 "포이합도하연안 고적도설"에서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다음과 같이 포이합도하 부근으로 보았다. "당시 조·청 양국의 경계는 복아합토(卜兒哈兎) 부근에 있었던 같다. 한인(韓人)의 구비(口碑)에 의하면 국자가의 남방 벌가토(伐加土)는 근년에 이르기까지 양국의 무역지점이었다고 말했다. 벌가토는 포이합도하의 대음이므로 양국의 경계선이 포이합도하 부근에 있었던 것은 의심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지방의 토성은 여진인의 옛터에 속하고 석성은 모두 한인(韓人)이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간도지방에 한인(韓人)이 거주하였던 것은 심히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며, 소위 월간에 즈음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이것은 봉금지대의 동북 경계가 포이합도하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한인(韓人)의 구비(口碑)는 윤관이 1107년 선춘령의 공험진에 세운 "고려지경"의 경계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후 이 지역이 양국의 경계선이었음을 밝혀 주는 것이다. 이상의 증거 자료로 볼 때 봉금지대와의 경계가 압록·두만강 선이 아니며, 양강의 본류에 대한 관할권도 조선에 있었다. 즉 봉황성의 남에서 압록강의 수계를 안은 산맥을 포함하여 두만강 북의 흑산령산맥을 포괄하여 노야령산맥 이남의 포이합도하가 봉금지대의 경계이다.

조선과 청 사이에 약정한 봉금지대는 청이 북경지역으로 입관한 후 한족들이 만주에 들어와 토지를 개발하는 것을 금지시키자 이 지역은 무인의 한광(閑曠)지대로 변하였다. 이 지역에서 간도문제를 직접 다루었던 국제법학자 시노다 지사꾸(篠田治策)는 "간도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무인의 중립지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조·청간의 강도회맹에서 양국이 이 지역을 각전봉강(各全封疆)하여 봉금지대로써 무주무인의 중립지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무인지대가 조선과 청에 의해 개간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청이 개간에 착수하기 수년 전에 이미 지방관이 지권을 발급하여 개간을 허용하였으므로 이 때부터 중립의 성질을 상실하였다. 즉 종래 무주무인의 중립지대였던 간도지역이 중립의 성질과 무인의 상태를 잃고 단순히 무주의 토지로 남게 되었다.

영토의 취득방법에는 선점(occupation)이 있다. 즉 무주지를 취득한 의사를 명백히 한 국가는 그 곳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이 선점적 지배사실을 이해관계국에 통고하면 선점지는 취득국의 영역이 된다. 이 선점의 원칙에 의거하여도 간도지역은 한국의 영토임이 분명하다.

3. 간도영유권 분쟁의 해결 방안

한·중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것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봉금지역을 시뇨다 지사꾸(篠田治策)가 언급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된 무인무주의 중립지대였지만 19세기 후반에 봉금이 해제되면서 무주지의 성격이 변화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양국 중에 누가 더 실효적 지배와 역사적 권원이 발현되었는가에 따라 영유권이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간도분쟁의 해결을 위해선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영토취득방법에는 선점이 있다. 즉 "무주지를 점유의 의사를 갖고 실효적 지배를 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간도지역은 봉금지대로서 무주지였기 때문에 누가 먼저 이주하였으며, 또한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 선점이론에 의하면 간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이다.

둘째, 간도지역에 이주한 한·중 양국의 주민비율을 고려하여야 한다. 1900년대 한인 이주자는 간도 지역의 총인구 13만 명 중 10만 명이 차지하였으며, 두만강 대안은 한인이 독점하는 등 한인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셋째, 이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평화적 주권발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Palmas도 사건에 의하면 "영역취득의 권원에 관해 발견의 권원이란 성숙되지 못한 것으로 실효적 선점에 의해서만 주권이 확립되는 것이고 성숙되지 못한 발견적 권원은 계속적이고 평화적인 주권발현에 기인하는 종국적 권원에 우선할 수 없다"고 하였다.

넷째, 간도분쟁에서 결정적 시점(Critical Date)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봉금정책을 양국 간에 약정한 1627년, 백두산정계비 건립 해인 1712년, 을유 국경 회담이 시작된 1885년, 간도협약이 체결된 1909년, 장래 한·중간에 간도분쟁의 해결절차를 회부하기로 한 시점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이 중 어느 시점이 가장 유리할 것인가를 분석하여야 한다.
다섯째, 국경의 획정시 고려되는 자연적 국경, 순환 등 비법률적 요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904년 영국령 가이아나 - 브라질 국경분쟁의 중재판결처럼, 실효적 지배에 의한 국경획정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자연에 의한 선(line traced by nature)"에 따른 국경획정을 한다고 하였다.

여섯째, 앞으로 간도영유권 주장의 성패는 중국조선족의 역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도지역에서 실제 점거하여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야말로 평화적인 주권발현을 하고 있는 당사들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려 요소를 볼 때 간도영유권 주장에선 한국이 우세하다고 볼 수 있지만 장래 간도분쟁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위의 고려 사항을 철저히 분석하여 장기적으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떠한 평화적인 해결 방법을 기대할 수 없다. 간도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면면이 살아 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정부와 국민이 조선족들이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만큼 큰 것은 없다고 본다. 이 길이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간도분쟁의 해결을 위해선 중국에 간도협약의 무효를 하루 빨리 통보하여야 하며, 미해결된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


Ⅷ. 맺는 말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목적은 결국 간도영유권의 확보로 귀착된다. 오랜 세월동안 조선족이 가졌던 민족정체성의 상실과 역사적 연원의 왜곡을 통해 점진적인 한족(漢族)으로의 동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간도영유권의 문제점은 단순히 과거에 얽매인 분쟁 해결을 위한 학설이나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미래에 다가올 통일시대에 있어서 간도분쟁지였던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에 관한 문제로 낙착된다는 점이다.

조선족 동포는 우리 민족에게 특히 간도영유권 주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족의 제반 문제에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 또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의 본질을 분석하고 그들의 장기적인 동화정책에 대한 대응책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정부는 간도 지역에 대한 국민의 합의나 국가정책을 제시도 하지 않았으며 민감한 외교문제라서 가능한 회피하는 경향이었다. 정부는 강대국의 눈치나 살피는 비자주적이며 주체성 없는 외교정책을 탈피하여 이제라도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여야 한다.

우리가 추진해야 할 대외정책이나 대외 활동에서 상대국의 정책 방향과 대립되지 않는 방향에서 신중한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국가적인 핵심이익은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된다. 영토문제는 국가의 절대적인 핵심 이익이다. 특히 간도지역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현재 연변자치주가 해체될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목적이 바로 연변자치주의 해체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에 대비하여 조선족 정책과 전략을 다시 수립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조선족의 실상은 중국의 동화정책에 의해 연변자치주가 해체될 위기에 직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리의 조선족에 대한 정책이 중국정부를 의식하여 소극적으로 신중하게만 추진한다면 연변자치주의 해체를 막을 수 없다. 조선족 문제와 연변자치주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정부차원에서 모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은 장기적인 한족(漢族)으로의 동화, 즉 중국화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족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조선족에 대한 정책대안을 제시하면서 간도영유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족 문제가 간도영유권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광복 이후 어느 때 우리 정부가 상대국과 대립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적 이익을 추구한 역사적 사실이 있는가. 항상 집권자의 업적위주의 외교활동이나 전시행정으로 국민들의 희생만 강요하였다.

조선족 문제와 간도영유권에 대하여 정부는 그 역사적 진실을 국민에게 밝혀야 하며 국가차원의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조선족 문제는 바로 간도영유권의 인식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족의 문제는 바로 민족의 문제이므로 국가차원의 문제로서 기존의 인식의 틀을 탈피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청·일 간에 맺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임을 중국에 통보하지도 않았다. 또한 대외적으로 간도 지역에 대하여 영유권이 있으며 한·중간에 미해결된 분쟁지역임을 밝히지도 않았다. 그 결과 최근 각종 국제회의에서조차 동북아 경협이나 동북아 안보를 논하면서 간도지역이 영토분쟁지라는 사실을 언급한 외국인 학자는 없었다. 일본·러시아간의 북방영토문제, 한·일 간의 독도문제 남사군도·조어대열도의 영유권분쟁을 예를 들면서도 이들보다 분쟁의 역사가 더 오랜 간도지역 영토분쟁은 한 마디조차 없다. 이러한 결과가 누구의 책임인가. 이것은 간도영유권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국민 모두가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도영유권을 분명히 주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2년 넘도록 간도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한 시뇨다(篠田治策)도 일본이 만주의 여러 현안 때문에 간도를 청에 양보한 것은 한국통치상의 화근을 영원히 남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간도영유권을 분명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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