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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8-04 03:42
조선후기 朝 淸 변경의 인구와 국경인식
 글쓴이 : 관리자 (118.♡.32.39)
조회 : 807   추천 : 0   비추천 : 0  

 

김 현 영(국사편찬위원회 교육연구관)

 

 Ⅰ. 머리말


이 글은 1909년 일본과 청 사이에 '간도 협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간도 문제가 조선과 청 사이의 영토 분쟁 지역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그곳이 분쟁 지역이 된 경위를 조선후기 조선과 청 사이의 변경 지역에 대한 양국의 인식과 인구 이동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국내에서의 간도 문제에 대한 주요 논점은 조청 간의 국경을 둘러싼 1712년의 穆克登의 査邊(백두산 정계비) 문제, 두만강 또는 토문강 등의 수원 문제, 양쪽 유민의 犯越 문제, 1880년대 후반의 양국의 邊務 협상, 일본과 청 간의 '간도 협약' 등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점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한국 측의 논문은 사건사로만 정리된 듯한 느낌이 강하다. 최근 중국 측에서는 다민족 통일국가론적, 애국주의적 관점을 바탕에 깔고 방대한 연구가 전개되고 있다.

본 논문은 사건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좀더 거시적 관점에서 양국의 변경 문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즉 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배 질서 = 화이 질서(宗藩 관계, 朝貢 관계) 하에서 청은 동북 지역(만주)을 어떻게 지배하였고 그러한 질서 속에서 만주 지역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으며, 조선과의 변경은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가? 조선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청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로 임하고 있었는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청의 동북 지역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인 봉금 정책과 봉금 정책과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진 조선과 청 사이의 변경 무인 지대가 양측에서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봉금이 해이해진 이후 양측 유민의 이동과 정착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과정까지 도달해 보고자 한다.


1. [華夷秩序] 하의 조선과 청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우리 나라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오랫 동안 만주 지역을 지배하였던 여진족은 인삼과 貂皮 등 경제적 이권을 중심으로 누르하치에 의하여 여러 부족들이 통합이 되고 드디어 중원을 지배하여 청 왕조를 성립시켰다. 조선 전기 조선과 명, 여진족의 질서는 [事大交隣] 질서로 설명될 수가 있겠다. 명은 조선을 통하여 여진족을 견제하였고 여진족은 조선과 교린을 한다고는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상하의 관계 속에서의 교류가 진행되었다. 16세기 후반 경제적 이권을 중심으로 여진 여러 부족들을 통합한 누르하치의 여진족은 중원을 정벌하기 전에 먼저 배후인 조선과의 관계 정립이 필요하였다. 혼타이지[皇太極]는 먼저 중원을 공략하기 전에 조선을 정벌하여 '형제의 관계'를 맺고, 이어서 '부자의 관계'로 배후를 안정시킨 후 중원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청 왕조가 안정적으로 중국 천하를 통일시킨 것은 17세기 중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에 가서야 비로소 청 왕조 나름의 안정된 화이 질서에 입각한 지배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청 왕조는 건륭제 시대에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영토라고 해도 그것은 현재 우리들이 세계 지도에서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다르다고 하겠다. 확실하게 경계선이 그어진 '영토'는 아닌 것이다. 그 '영토'를 청 왕조가 어떻게 구분하여 지배했는가에 대하여 기시모토 미오(岸本美緖)는 매우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기시모토는 시게키 도시오(茂木敏夫)가 설명한 그림을 인용하여, 동심원을 비스듬히 나눈 형식의 모델로 청 왕조의 지배 체제를 설명하고 있다. 즉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그어진 분할선에 의해 나누어진 동남쪽의 반달과 서북쪽의 반달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중국 황제, 즉 중국 '황제'로서의 얼굴과 북방 민족의 '한(Khan)'으로서의 얼굴로 중국을 지배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그림 1> 참조)


동남 방면으로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향하는 형식을 보면, 황제가 사는 북경에는 중앙 정부기관이 설치되어 있고, 대개 명의 지배 영역에 상당하는 본토에는 18개의 省이 두어졌다. 성을 둔 지역[直省]에서는 명대와 비슷한 지방관제에 의해 과거 관료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통치하였고 그 대부분은 한족의 거주지였다. 18개 성 중에서도 서남쪽(貴州, 雲南, 廣西 등)에 상당수 거주하던 묘족, 야오족, 치완족 등 기타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그 유력자를 '土司'가 임명되어 세습적인 통치를 행하였다.

그 바깥 쪽에는 예부가 관할하는 조공국들이 있었다.

1818년에 편찬된 {大淸會典}에 실려 있는 조공국은 조선, 유구, 베트남, 라오스, 타이, 스루(필리핀 남부), 오란다, 버어마, 서양(포르투갈, 로마교황청, 영국)이 있었다. 나아가 사절을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공국 가운데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민간의 무역을 통하여 접촉이 있는 나라들도 있다. 광주(廣州)에 내항한 유럽 여러 나라나 일본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조공국의 바깥에 [互市]의 나라로서 위치지어져 있다. 이들도 청 왕조의 눈으로 보면 천자의 덕을 흠모하여 天朝의 물산을 바란다고 하는 의미에서 잠재적인 지배 관계의 틀 속에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북쪽의 반달은 준(準) 중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특별 지역으로서의 동북이 있다. 청 왕조 발상의 땅인 동북 지역은 특별 행정 구역이 되어 奉天(지금의 瀋陽)에는 수도 북경의 중앙 관제에 준하는 관제(6부에서 이부를 제외한 5부 등)이 두어지는 외에 봉천·길림·흑룡강의 세 장군이 지역을 나누어서 통치하였으며, 청 왕조의 발상지인 길림 지역은 봉금 정책으로 지배하였다.

그 서쪽으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외 몽골, 신쟝[新疆], 티베트라고 하는 비한민족의 지배 지역이 나열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그 통합의 경위에서 같은 비한민족이라고 해도 먀오족이나 야오족 등과 달리 원래 상당히 자립적인 권력이 있었던 곳이 정복이나 투항 등에 의해 청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온 것이다. 이들 지역은 [번부(藩部)]로서 이번원(理藩院)의 관할 지역이 되어서 청 왕조의 감독 하에 고유의 사회 제도가 유지되었다. 즉 몽골에서는 몽골 왕후(王侯)가 신쟝에서는 토르코계의 유력자 [베그]가, 티베트에서는 달라이라마가 현지 지배자로서 존속한 것이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청대의 지배 영역 중에 동심원 상의 조공국 바깥을 제외한 藩部·直省 지역에 대강 상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연해주 등 동북의 북부가 러시아령이 되고, 외몽골이 몽골국이 되고 또한 청대에는 福建省의 일부였던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지배의 밖에 있는 외에는 대략 중복된다. [번부]에 해당하는 지역은 현재는 省級의 [자치구]가 되어 있는 곳이 많다. 서남 소수 민족인 [土司] 지배 지역에는 자치현·자치주가 두어져 있는 곳도 있다. 이처럼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적 골격은 대략 청대 중기에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하마시타 다케시(濱下武志)는 전근대의 외교 관계를 화이 질서로 파악하여 위의 <그림 2>와 같이 청을 중심으로 한 외교 관계를 설명하였다. 그는 의례·외교·무역·군사 등에 의하여 구성되는 조공 체제가 역사적으로 생성되고 발전하여 서양의 충격에 의하여 종언을 고하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 시스템을 설명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큰 핵과 주변의 여러 개의 핵을 가진 화이 질서에 기초를 둔 세계 질서를 묘사하였다.

화이 질서 가운데서도 가장 전형적인 화이 질서 즉 조공 관계에 기초한 화이 관계의 전형으로 조선과 청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과 청과의 관계도 그리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청은 방대한 지방과 異民族, 異地域을 지배하는 시스템으로서 화이 질서를 이용하였지만, 여진족, 명과의 전통적인 의리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조선으로서는 정신적으로까지 청에 복속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여진족에 대한 '북벌' 사상이 '북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는 청으로부터 배우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조선이 중화 문명을 지키고 있다는 문화적 자존심은 '소중화'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대표적 북학론자 박지원의 {열하일기} [渡江錄]의 서문은 그러한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청의 연호인 '乾隆'을 쓰지 않고 '崇禎後三庚子'를 쓰는 이유를 밝혀 소중화 사상의 문화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 때문에 '後三庚子'라는 말을 이 글 첫 머리에 썼는가. 行程과 陰·晴을 적으면서 해를 표준 삼고 따라서 달수와 날짜를 밝힌 것이다. 무엇 때문에 '후'란 말을 쓰는가. 崇禎 紀元의 뒤를 말함이다. 무엇 때문에 '삼경자'라 하는가. 숭정 기원 뒤 세 돌을 맞이한 경자년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숭정'을 바로 쓰지 않았는가. 장차 강을 건너려니 이를 잠깐 피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피했는가. 강을 건너면 곧 淸人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의 年號를 쓰는데 감히 숭정을 일컫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대로 '숭정'을 쓰고 있는가. 皇明은 중화인데 우리 나라가 애초에 승인을 받은 상국인 까닭이다. 숭정 17년에 毅宗烈皇帝가 나라를 위하여 죽은 뒤 명이 망한 지 벌써 130여 년이 경과되었거늘 어째서 지금까지 숭정의 연호를 쓰고 있는가. 청이 들어와 중국을 차지한 뒤에 선왕의 제도가 변해서 오랑캐가 되었으되 우리 동녘 수천 리는 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룩하여 홀로 선왕의 제도를 지켰으니, 이는 명의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존재함을 말함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 몰아내고 中原을 숙청하여, 선왕의 옛 것을 광복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라도 높여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조선과 청 사이의 이러한 특수한 화이 관계는 변경과 국경에 대한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청은 대국으로서의 '字小' 의식을 가지고 조선을 대하였으며, 조선은 현실적으로 청의 힘에 복종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들의 사소 정책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以小事大'와 '以大事小'에 입각한 전통적 동아시아의 화이 질서는 조선과 청 사이의 변경 문제를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질서가 근대적 외교 관계로 이행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의 근대적 변경 인식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조·청 변경과 국경 인식

앞에 인용한 {열하일기}는 1780년(정조 4) 燕巖 朴趾源이 乾隆帝의 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熱河에 가는 사신의 일원으로 참가한 후 돌아와서 저술한 것이다. 그의 요동 지역에서의 초반의 路程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6월 24일 의주를 떠나 압록강을 건너 10리를 가서 애랄하(愛刺河), 鎭江府를 거쳐 30리 지점인 九連城에서 노숙하며 1박을 하고, 다음날인 6월 25일에도 30리를 더 가서 노숙을 하였으며, 다음 날인 6월 26일 金石山을 지나 30리를 더 가  秀에서 노숙을 하였다. 4일 째인 6월 27일에는 그 날 드디어 柵門에 들어가게 되는데, 책문은 架子門이라고도 하고 중국인들은 邊門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 책문에서 비로소 사신단 일행은 짐을 검사하고 중국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책문에서 중국의 조선 쪽의 첫 번 째 변경 도시인 鳳凰城까지는 아직도 30여 리가 남았다. 3박을 노숙하고 4일 동안 여행하여 청의 관문인 책문에 들어갈 때까지 그는 한 사람의 중국인을 만날 수가 없었다. 다만 4일 째인 6월 27일에 애랄하에 품삯을 받고 수 자리를 살러 가는 중국인 甲軍 5∼6명을 만났을 뿐이었다. 조선과 청 사이의 120리 50km에 이르는 지역이 空曠地帶로 두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노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6월 24일 의주에서 출국을 하는 검사를 하고 4일째인 6월 27일 중국의 관문인 책문에서 들어가기 위하여 짐을 검사할 때까지 한 사람의 중국인도 만날 수가 없었다. 단지 품삯을 받고 수 자리를 살러 가는 중국인 갑군 5∼6명을 만났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압록강에서 책문이 있는 봉황성까지 120리(48km)에 이르는 지역이 무인 지대로 비워두었던 것이다.

이 공광 지대 혹은 무인 지대, 완충 지대의 성격을 청의 봉금 정책과 유조변, 조선과 청 양측의 이 지역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검토해보자.


1) 청 왕조의 동북 지역 지배: 柳條邊의 설치와 봉금 정책

책문이라고 불리는 변문은 중국 동북지방의 동쪽 변방인 東柳條邊의 여섯 번째 변문이다. 유조변이란 청 왕조의 중국의 동북 지방에 대한 지배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邊墻이다. 中國國家文物局에서 편찬한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에는 柳條邊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길림 동부 장백산 지구를 '龍興發祥之地'로 보고 청 초기부터 封禁을 실행하였다. 봉금 정책을 실시하기 위하여 청 정부는 1670년(강희 9)에 지금의 요녕성 開原 威遠堡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邊墻을 수축하여 위에는 柳條를 심어 '柳條邊'이라고 칭하고 1681년(강희 20)에 완성하였다. 전장 343.1km이고 연선에 경비 시설( 倫)을 설치하고 군병을 주둔시켜 流民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지금도 四平에서 梨樹, 公主嶺, 伊通, 長春, 九台를 거쳐 바로 舒蘭에 도착하여 아직도 구불구불 이어진 유조변의 유적을 볼 수 있다. 四平市 山門鄕에는 아직도 布爾圖庫蘇巴爾汗邊門衙門의 兵舍가 남아 있다. 유조변이 봉금의 지역을 표시하기 때문에 청 초기에는 일찍이 永吉 烏拉街에 打牲烏拉摠管衙門을 설립하였는데, 청 황실에 제공하는 貢品을 전담하여서, 인삼을 채취하고,  魚를 잡고, 東珠를 채취하며 珍禽異獸 등을 사냥하는 일을 하였다. 打牲烏拉摠管衙門의 특수한 지위는 永吉烏拉街 일대를 한 때 상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여 관아와 王府가 꽉 들어섰고 寺廟와 民居가 줄지어 있었다. 이러한 건축물은 지금도 아직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설명은 길림성의 柳條邊에 한정된 설명이어서 청 왕조의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지배정책과의 맥락 속에서 설명했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柳條邊이 청 왕조의 동북 봉금정책의 한 측면을 말하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청 왕조의 동북 지배정책을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하였다. 유조변은 명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명대의 요동 변장은 몽고와 여진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서쪽은 지금의 遼寧 綏中縣 경내의 鐵場堡에서 시작하여 압록강에까지 이르는 U자형의 길이 1960里의 변장이었다. 청 왕조에서도 명 왕조 때에 있었던 요동 변장의 기초 위에서 유조변을 수축하였다. 청 정부는 1670년(현종 11, 강희 9)에서 1681년 사이에 동쪽으로는 吉林市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開原 威遠堡 변문에 이르는 유조변을 수축하였는데, 이를 '新邊'이라고 불렀다. 이 유조변은 山海關, 威遠堡 변문, 鳳凰城 변문, 吉林 法特哈 변문의 4지점을 연결하는 선으로 '人'자 형상의 변장을 완성하였다. 1682년(강희 21) 강희제의 동북 지방 순행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鳳凰城에서 북쪽으로 開元縣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서쪽의 山海關에 이르는 1900여 리 19개 변문을 가진 柳條邊은 '老邊' 또는 '盛京邊墻'으로도 불렸다(<그림 3> 참조).

 

이 변장의 기능으로는 첫째 각 민족의 활동 界限을 구분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유조변의 서북부는 몽골 민족의 목장으로서, 동북부는 수렵 민족의 삼림 지대로서, 남부는 청 황실의 田庄, 八旗 官兵의 旗地와 漢族의 農田의 역할을 하였다. 둘째, 변장은 행정 구역의 분계선 역할도 하였다. 청 정부는 1644년(인조 22, 순치 원)에 內大臣 何洛會를 盛京城에 駐守시키고 盛京統部라고 칭하였다. 1662년(현종 3, 강희 원)에는 鎭守遼東等處將軍(강희 4년에 奉天將軍, 건륭 12년에 盛京將軍으로 개칭함), 寧古塔將軍(건륭 12년에 吉林將軍으로 개칭)을 두었고, 1683년(숙종 9, 강희 22)에는 黑龍江將軍을 두었다. 또한 산해관에서 동쪽으로 7변문을 설치하고 변문 밖은 몽골 부락으로 盛京將軍이 지배하는 변문의 안과 구별하였다.

동남쪽으로 봉황성까지는 6변문이 있었는데, 奉天의 盛京將軍과 寧古塔將軍을 분계하는 역할을 하였다. 셋째, 변장은 동북 지구에 설치한 각종 禁地의 보호 기능을 하였다. 즉 청 황실의 陵寢이나 牧場, 圍場, 蔘場 등의 보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청대의 변장은 몽골과 조선 등에 대한 군사 방어선, 생산 방식이 다른 각 민족의 지리 분계, 동북 지구의 행정 구역, 청 왕조의 각종 禁地의 천연 경계 표지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청 왕조의 동북 지방에 대한 봉금 정책의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淸代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보통 동북 봉금을 논할 때에 흔히 순치 년간에 동북에 유조변을 수축하고 '印票' 제도를 실행하여 동북 봉금이 개시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순치 년간에는 동북을 봉금한 사실이 없고, 순치 년간에 수축한 유조변과 인표 제도는 동북을 봉금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청 정부의 봉금 정책이 청초부터 시작되었다고 이해되어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본격적인 봉금 정책은 1740년(영조 16, 건륭 5)에 개시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1740년 이후의 일련의 봉금령은 이러한 봉금 정책을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전의 요동 지역에 대한 청 정부의 招墾 정책은 순치 년간부터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봉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張杰은 첫째 순치 년간의 '遼東招墾'을 들었다. 1653년(효종4, 순치 10)에 청 정부는 동북의 전통 농업 지구의 생산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遼東招民開墾令]을 반포하였다. 초간령에는 100명을 초치하는 자는 문반인 경우에는 丞, 主簿 벼슬을 주고 무반인 경우에는 百總을 주며, 초민 수가 증가하면 매 100명 마다 1급을 더한다고 하였다. 또한 1662년(현종 3, 강희 원)에 명 永曆 정권이 망하자 대륙의 청에 대한 저항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바로 청 정부는 동북으로 눈을 돌려 단시간에 연속 3차에 걸쳐서 '招民出關開墾令'을 내렸다. 그리하여 1661년 奉天府의 人丁이 5557인이었던 것이 1668년(현종 9, 강희 7)에는 16643인으로 3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에 청 정부는 '招民授官令'을 폐지하였는데, 이를 연구자들은 봉금 정책의 개시라고 오해하였다는 것이다.

招民授官例를 취소한 후 6년 내에 奉天府尹이 관할하는 承德(지금의 심양시), 遼陽, 海城, 鐵嶺, 開原, 盖平, 錦州, 遼遠(지금의 요녕성 흥성시), 廣寧(지금의 요녕성 북녕시) 등 9 州縣의 인구가 15681丁이 증가하였다. 이상의 9 주현은 순치 년간에 설립한 遼陽, 海城을 제외한다면, 기타 7 주현은 모두 康熙 년간에 설치된 것. 雍正 년간에도 奉天 지구에 義州, 復州, 寧海縣을 증설하였다. 1727년(영조 3, 雍正 5)에는 吉林烏拉에 永吉州, 寧古塔에 泰寧縣을 설치하고 伯都訥에 長寧縣을 설치하여 모두 奉天府에 속하게 하였다.

順治, 康熙, 雍正 3조에 關外에서 초민 개간을 한 것은 동북을 청 왕조의 발상지로서 順治 원년에 청이 入關한 후에 盛京을 陪部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명말의 전란과 100만의 팔기 병정과 가속들이 '從龍入關'한 후에 동북 남부의 전통농업지구가 쇠락하여 지고 러시아가 흑룡강 유역에 침입하여 동북 북부의 防邊이 급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청 정부는 1653년(효종 4, 順治 10)에는 (1)寧古塔昻邦章京을 임명하여 러시아의 침략을 저항하게 하고, (2)요동을 초민 개간하여 농업 생산을 발전시키는 두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청 정부의 동북 지구에 대한 봉금 정책이 개시된 것은 1740년(영조 16, 乾隆 5)부터라고 한다. 1740년 4월에 청 정부는 봉천 지구에 대한 봉금령을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산해관 출입자의 제한("山海關出入之人必宜嚴禁"),  상선에 의한 출입 제한("嚴禁商船携載多人"),  호적에 편입되지 않은 자의 출입 제한("稽査保甲宜嚴"),  봉천 지구 공한지의 기인 이외의 경간 금지("奉天空閑地畝專令旗人墾種"),  초피, 목재 등 산림의 이익 금지("嚴禁鑿山以餘地利"),  인삼 채취 금지("重治偸採人參以淸積弊") 등이었다. 또한 1741년(건륭 6) 5월에는 길림 지구에 대하여, 1742년(건륭 7)년 3월에는 흑룡강 지구에 대한 봉금령을 반포하였다.


2) 조·청 간의 완충 지역을 둘러싼 논의

우리는 이러한 중국 동북 지역의 봉금 정책과 함께 조선과 청 사이의 변경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1880년대 후반의 조선과 청 사이의 勘界 논의도 이러한 봉금 정책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과 청 사이에는 동북 봉금 지역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계선으로부터 120리 지역을 청과의 緩衝地帶(혹은 空曠地帶, 無人地帶)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과 청 측의 사료에는 양측 流民과 奸民들의 범월을 방지하기 위하여 양국의 경계에서 서로 120리에 이르는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여 개간하거나 경비 시설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 완충지대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 동북 지역의 지배를 맡고 있는 성경장군, 길림장군 사이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교섭과 대립이 있었지만, 양국간의 문제 발생을 우려한 조선 쪽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청 중앙 정부는 '字小之恩'의 입장에서 항상 조선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였다. 따라서 1885년, 1887년 간도 지역의 勘界 문제도 조선과 청 사이의 이러한 특수한 관계 속에서 이해를 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청 왕조의 조선의 지리와 조선과의 강계에 대한 인식은 어떠하였는가에 대해 검토해보자. 康熙帝는 조선 국왕이 공경함을 다하고 있음을 칭찬한 뒤, 조선이 8도가 있으며 북으로 瓦爾喀 지방의 토문강과 접하고 동으로 왜국과 접하였으며, 서쪽으로는 鳳凰城, 남쪽으로는 바다와 접하고 있다는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711년 이만기 월계 살인 사건으로 조선과 청이 회심하는 것을 계기로 동북 지방에 대한 사변을 하고 그 이듬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졌지만, 강희제는 동북 지방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인식을 가지기를 원하였다. 강희제는 1711년 5월에 지도를 그리는 것이 옛날처럼 하지 말고 명확히 하라고 하면서 중국 동북의 경역과 조선과의 경계를 확실히 하기를 원하였다.


옛날부터 지도를 그리는 자가 천상의 도수에 의거하지 않고 지리의 원근만으로 추산을 하였기 때문에 差誤가 많다. 짐은 전에 특별히 계산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을 파견하여 동북 일대의 산천과 지리를 모두 천문의 度數에 推算하여서 지도를 자세히 그렸다. 混同江은 長白山 뒤에서 나와서 船廠의 打牲烏喇를 거쳐 동북쪽으로 흘러가서 黑龍江과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는 모두 중국의 땅이다.

압록강은 장백산에서 동남쪽으로 흘러나와서 서남으로 향하여 봉황성과 조선국 의주 사이를 거쳐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압록강의 서북은 중국의 땅이고 강의 동남쪽은 조선의 땅이니 강을 경계로 한다. 토문강은 장백산 동쪽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향하여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토문강의 서남은 조선 땅이고 강의 동북은 중국 땅이니 역시 강을 경계로 한다. 이곳은 모두 명백하다. 다만 압록강과 토문강 두 강의 사이의 지방을 알 수가 없다. 전에 관원 2인을 파견하여 봉황성에 가서 조선인 이완기(이만기의 오) 사건을 회심하였고, 또 打牲烏喇悤管 穆克登을 함께 가도록 파견하였는데, 너희들이 訓旨를 청할 때에 짐이 비밀리에 下諭하기를 너희들이 이번에 가서 지방을 査看하여야 한다. 조선 관원과 함께 강을 따라 올라가되 중국에 소속한 지방을 갈 수 있을 때에는 조선의 관원과 함께 가고, 중국 소속 지방에서 조선 관원과 함께 가되 혹 중국 소속 지방이 장애가 있어 지날 수 없을 때에는 너희가 함께 조선 소속 지방을 가도록 하라. 이 편에 끝까지 가서 자세히 본 다음에 변계를 조사하여 아뢰어라.

康熙帝는 정확한 과학적 지식의 토대 위에서 동북 지역의 지도를 그리기를 원하였다. 또한 조선에 대해서도 8도와 동서남북 4방의 接界 지역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과 청과의 경계를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다만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의 험난한 곳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을 뿐이다. 穆克登에게 비밀리에 지시한 것은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의 장백산 변계를 충분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康熙帝의 이러한 지시는 길이 멀고 추워서 실행되지 못하여 다음 해로 연기되었으며, 조선 국왕에 정식으로 통고가 되어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다.

1712년 穆克登의 査邊과 백두산 정계비의 성립은 이러한 사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강희제는 분명히 서쪽으로 압록강과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양국의 경계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목극등이 [東爲土門 西爲鴨綠]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康熙帝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과 청은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하고 있었지만, 이 두 강의 건너 편 120리에 이르는 일대의 지역이 완충 지대 또는 무인 지대로서 비워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완충 지대를 유지하려는 조선과 청의 노력이 또한 양측의 사료에서 많이 확인할 수 있다.

<완충 지대에 대한 조·청 간의 교섭 사건>

1715년(숙종 41, 康熙 54); 토문강 건너편에 집을 짓고 개간; 조선 정부의 항의 자문; 강희제가 철거 명령
1727년(영조 3, 雍正 5); 11월에는 조선 국왕의 자문에 의해 邊口를 私越한 匪類를 조사하고 邊口를 지키지 못한 관원을 처벌
1731년(영조 7, 雍正 9); 草河· 河가 만나는 莽牛哨에 경비 시설 설치 시도[展邊]; 조선 정부의 항의 자문; 옹정제가 우리 나라에 편부를 물어 停罷
1737년(영조 13, 乾隆 2) 內地(盛京) 상인들의 中江開市 중지
1744년(영조 20, 乾隆 9) 馬尙船으로 江界 지역 越邊
1746년(영조 22, 乾隆11) 다시 망우초에 경비 시설 설치 시도[展邊]; 조선 정부의 항의 자문; 정지
1842년(헌종 8, 道光 22) 조선의 상토진, 만포진의 건너편에 중국인이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한 것에 대하여 항의하고 철거, 처벌함
1842년(헌종 8, 道光 22) 12월, 토문강 부근 혼춘 지역에 조선 유민이 토문강 일대에 넘어가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 중국에서 토문강 부근의 지방 정형 조사
1846년(憲宗 12, 道光 26), 강계 지방에 비류가 와서 사는 문제를 사핵해서 구명하게 함
1869년(고종 6, 同治 8) 7월, 압록강과 봉황성 사이에 유민들이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라는 조선의 자문
1869년(고종 6, 同治 8) 11월, 동북 지역의 장군 展邊을 주장. 조선 국왕의 요청에 따라서 적절히 처리하고, 전변할 때에는 전례대로 할 것을 지시
1869년(고종 6, 同治 8), 청 측에서 조선국인이 러시아 경계에 들어가 개간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조선에 금령을 요구
1870년(고종 7, 同治 9), 조선 碧潼 관할 小坡兒鎭 지방에 游民이 戒鬪. 양 측의 주민이 서로 다투지 않도록 지시
1870년(고종 7, 同治 9), 慶源府 農圃社 居民 李東吉이 혼춘 지방에서 토지를 개간, 유민 招諭
1885년(고종 22, 光緖 11), [乙酉勘界]
1887년(고종 24, 光緖 13), [丁亥勘界]

완충 지역을 둘러싼 양국간의 문제가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은 1715년(숙종 41, 康熙 54)의 일이었다. 1715년, 청의 백성들 가운데 土門 건너편 강가의 근처에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한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조선에서 咨文을 올려 아뢰자, 康熙帝가 속히 철거시키는 명을 내렸다. 이 문제는 양측의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으나, 1746년 鳳凰城將이 압록강 건너편 10리 지점에 있는 망우초에 경비 시설을 설치하려는 시도를 하자 조선 정부의 항의 자문으로 중지되는 과정의 前例로서 들어지고 있다. 1746년의 망우초 경비 시설 설치 시도에 대한 조선측의 咨文을 보기로 하자.

1715년(숙종 41, 강희 54) 중국의 백성들 가운데 土門 건너편 강가의 근처에 집을 짓고 田地를 개간한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저희 나라에서 咨文을 올려 진달하자 康熙帝(聖祖仁皇帝)께서 속히 철거시키는 명을 내렸었으며, 1731년(영조 7, 옹정 9)에 草河와  河의 둘 물이 만나는 곳({열하일기}에서 말하는 압록강에서 10리 지점에 있는 애랄하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됨)에 경비 시설을 설치하려 했는데 이는 변경을 엄히 하여 간사한 무리를 금지시키기 위한 지극한 정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雍正帝(世宗憲皇帝)께서 담당 부서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다 편부를 문의하게 한 다음 이어 停罷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1737년(영조 13, 건륭 2)에는 內地(중국 盛京)의 상인들에게 中江에서 交市하도록 하는 명이 있었으나 우리 황제께서 특별히 우리 나라의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시어 즉시 중지시키게 하였으니, 국경에 관계된 일을 신중히 하고 우리 나라를 은혜롭게 돌보아 주신 것이 전후 한결같았고 또한 은덕이 지극히 후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여러 신하가 국경을 정성스럽게 잘 지켜 다행히 죄를 범한 것이 없게 된 것은 오로지 여기에 힙 입었던 것입니다.
  지금 莽牛哨의 副都統이 와서 巡審한 곳은 곧 1731년에 경비 시설을 설치하려다 停罷한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 둔전을 설치하고 토지를 개간하려는 것은 土門·中江 두 강 등의 일에 견주어 그 경중이 현격합니다. 전에 이미 여러 번 곡진한 성은을 입었었으니, 오늘 신이 있는 힘을 모두 기울여 고하면서 자애로운 황제께서 굽어 살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여기에서 보면 1715년에 중국의 백성들 가운데 土門 건너편 강가의 근처에 집을 짓고 田地를 개간하자 조선에서 康熙帝에게 咨文을 올려 속히 철거시키는 명을 내리게 하였다. 또한 1731년에도 草河와  河의 둘 물이 만나는 곳({열하일기}에서 말하는 압록강에서 10리 지점에 있는 애랄하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됨) 즉 망우초에 경비 시설을 설치하려 했는데 역시 이에 대해서도 조선 쪽의 의견을 들어 경비 시설의 설치를 저지하였다.
1727년(옹정 5) 11월에는 조선 국왕의 자문에 의해 邊口를 私越하여 조선 지방에 들어온 자에 대해서 조선은 항의를 하였고 청에서는 守口 관원을 파악하여 革職하고 조사하였으며 앞으로 엄격히 査禁할 것을 시달하였다(張杰의 봉금 개시 시기의 이해와 다름. 張杰의 봉금 개시 시기에 대한 이해는 각 지역에 강화된 봉금령을 그렇게 본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음 1731년(옹정 9)에는 초하와 애하가 만나는 지점에 망우초의 강에 초소를 설치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조선 정부의 항의로 저지되었다.
이 사건은 奉天將軍 那蘇圖는 上奏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鳳城 邊外의 육로 防 인 虎兒山 부근에 草河,  河 두 강이 있는데, 水源은 邊內에서 흘러나와 변외의 莽牛哨 지방으로 들어가서 만나 中江으로 들어간다. 중강 가운데에 섬이 있는데 江心 라고 하는데,  의 서쪽은 중국에 속하고  의 동쪽은 조선에 속한다. 매년 匪類들이 小船을 타고 수로를 거쳐 米糧을 몰래 운반한다. 그런데 虎兒山 은 河水로 막혀서 조사할 수가 없고 또 경계가 조선에 연결되어서 잡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莽牛哨 지방에 水 을 설치하고 船隻을 만들어서 虎兒山 陸  부분의 官兵을 조발하고 다시 부분 弁兵을 첨가하여 전적으로 조사하도록 하여 봉쇄한 후에 虎兒山 陸 은 철회하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청 중앙 정부는 設 하는 곳이 이미 조선과 경계가 이어져 있어서 조선 국왕에게 물어서 해국에 불편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영조는 여러 신하들과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에 좌의정 趙文命은 "(그곳은) 順治 때부터 柵門 밖 1백여 리의 땅을 버려 두고 피차 서로 접하지 못하게 했으니, 그 뜻이 깊었던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변방 백성들이 근래 매우 간악하여 경계를 넘어 移居하는 자가 있으니 마침내 반드시 중국에 죄를 얻을 염려가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이자하여 막는 것이 옳습니다"고 주장하여, 영조는 김경문을 보내어 舊例를 준수하도록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봉황성 邊柵 밖의 地界를 비우고 버려 두었으며, 人戶가 서로 접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나라 변민 간에 頑 한 것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편의를 봐주면 바로 生奸이 생기기 때문이고 또 만약 水 을 그 나라의 지근한 곳에 설치하면 窩鋪가 이어지고 舟楫이 상통하여 여러 가지 奸弊가 반드시 생길 것이니 그로 인해 양국간의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결국 奉天將軍 那蘇圖의 주장은 조선 국왕의 咨覆에 의하여 莽牛哨 江心 에 경비 시설을 전진 배치하는 것은 중지되었다.

內閣에 下諭하기를, 전에 奉天將軍의 주청으로 草河· 河 등의 곳에 防 을 설립하자고 하여 짐이 이 땅은 조선국과 경계가 연결되는 곳이므로 그 나라에 혹 불편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특별히 (그 나라에) 물어보라고 말하였다. 이제 그 나라 국왕이 주청하여 舊例를 준행하자고 하므로 청한 바에 따라 반드시 防 을 添設할 필요가 없고 또한 다시 논의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청 중앙 정부의 결정에 대하여 우리와 변경을 맞대고 있는 봉천장군으로서는 우리의 사행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트집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즉 1748년(영조 24) 사행 일원이 은을 망실한 일로 혐의자를 구금하자 중국측에서는 도리어 관련 증인과 역관을 구금하여 사행의 행차를 방해하였다. 우리 측은 이를 심양의 장수가 망우초의 일에 대해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서 일으킨 트집이었던 것이다.

변계를 둘러싼 논의는 1744년(건륭 9)에도 있었다. 조선 국왕은 사신을 통하여 6월에 중국인 23명이 馬尙船 3척을 타고 高山里에서 배를 저어 江界府 소속 古閭延 등 地界로 들어왔고, 6월 25일에도 또 15명이 마상선 2척을 타고 行岩仇非 지방에서 함경도 경계로 들어갔으며, 26일에 또 12명이 마상선 1척을 타고 竹岩仇非 지방에서 함경도 지방에 들어갔다는 것을 고발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康熙帝(聖祖仁皇帝), 雍正帝(世宗憲皇帝)가 칙령을 내려 申禁한 것으로, 波猪江 일대 마상선인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작년 봄부터 다시 떼를 이루어 나타서 갑작이 採獵하고 도망간 다고 하였다.

1746년(건륭 11, 영조 22)에는 앞에 거론한 망우초 지역에 군사를 전진 배치하고 둔전을 하려는 시도가 다시 제기되었다. 이에 조선 국왕은 강력하게 항의하여 저들의 시도를 저지하고 앞으로는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기록을 남기게 하였다.

達勒當阿가 上奏한 바 展邊墾土 건은, 조선 국왕이 이미 봉황성에 柵을 세우는 것 이외에는 공지를 백 여 리를 두어 내외를 격절하게 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혼잡하고 일이 생기는 병통이 생기는 것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이 上奏는 아직도 행하여야 한다. 봉황성 변책이 있는 곳은 해 국왕이 청한 대로 정지하고 아울러 담당 부서(예부)에서는 해 국왕에게 전유하여 알리라.

또한 7월 23일에 다시 軍機大臣 等에게 하유하여, 이러한 사실을 바로 達勒當阿에게 효유하여 舊制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고, 후임 장군 大臣이 모를 수 있어 또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該處  案에 기록하여 영원히 준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건륭제는 다시 尙書 班第를 망우초 지방에 파견하여 査勘하도록 하였다. 班第는 그 지역이 중국의 경계 안이어서 조선과 관련이 없다고 하면서도, 조선이 불편하다고 하므로 경비 시설을 설치하는 것을 정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과 청 사이의 완충 지대를 둘러싼 이러한 논의는 범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제기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도 몰래 採蔘하는 것을 조사, 방지하기 위하여 청측에서 수비병과을 증설하자는 논의를 하였다.

변경의 완충 지대에 대한 논의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1842년의 일이다. 조선의 上土鎭, 滿浦鎭의 건너편에 중국인이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한 것에 대해 조선 측에서 자문을 보내어 항의를 한 것이다.(5월 28일) 이에 청 중앙 정부는 범월한 민인을 잡아 처벌하고 관리들도 처벌하도록 하였다.(6월 초5일) 이에 현지의 관원인 禧恩 등이 상주한 연강 변계 문서를 검토하고, 盛京의 內地 민인이 조선 변계에 넘어가서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즉 楡樹林子 카륜 소속과 帽爾山 카륜 소속 경계에 집 28처, 草房 90여 간, 토지 3300여 畝를 개간한 사실을 파악하여 이를 모두 불태우고 범인인 唐仁 등을 잡아서 처벌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토문강 부근 혼춘 지역에 간민이 토문강 일대에 넘어가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여서, 經額布 등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토문강 부근의 지방 정형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의하면 영고탑 혼춘 지역이 조선과 접하여 있는데, 간민들이 토문강 일대에 넘어가서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장군이 관원을 파견하여 英安河 密占 카륜 등의 곳을 조사하여 보니, 과연 그곳 旗人이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고 있는 사실을 발각한 것이다. 이에 그 관원은 房屋 수십 곳을 훼손하고 토지 1000여  을 모두 버리도록 하였다.

1846년에는 강계, 여연, 사파 등지에 비류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데, 이 지역은 두 나라의 경계여서 금법이 엄하니 조사하도록 하였다. 비변사에서는 1842년의 상토, 만포진 건너편에 그러한 일이 있어서 중국에 말하여 쫓아낸 사례가 있음을 말하고 그 때 보다 많으니 성경에 이자하여 조사하도록 요청하였다.

1869년(고종 6, 동치 8) 7월에는 압록강과 봉황성 사이에(鴨江之北 鳳城之外) 유민들이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라는 조선의 자문이 있었다. 특히 奉天 변외의 유민들이 사사로이 개간하여 모여드는 군중이 날로 번성하고 있는데, 전부터 延煦 등에게 가서 査勘하라고 하고 章程을 참작하여 안으로 邊界 및 邊禁의 각 절목을 헤아리고 都興阿 등이 힘써서 주획하도록 지시하였다. 청 중앙 정부는 이 일이 변강에 관련되므로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끝이 없고, 유민들이 임의로 넘어가서 점차 朝鮮 柵路에 미치게 되면 조선에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조정에서 藩封을 綏緝하는 뜻이 아니라고 하며, 都興阿, 額勒和布, 恩錫에게 황제의 뜻을 따라 빨리 籌辦하고 어떠한 정형인지 사실대로 상주하라고 지시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都興阿 등 동북 지역의 장군들은 중앙 정부의 뜻과 달리 변외로 확장할 것(展邊)을 상주하였다. 都興阿 등이 展邊事宜를 조사하여 상주하였으나, 조선 국왕은 강안 일대에 3∼50리를 남기어 계한을 획청하자는 논의, 들이 평활한 곳은 획계하기가 좀 멀다는 말 등의 의견을 내서, 결국 청 중앙 정부는 조선 국왕의 요청에 따라서 적절히 처리하고, 전변할 때에는 전례대로 할 것을 지시하였다. 즉 유민이 사사로이 개간하거나 소요를 일으키는 폐가 있으면 바로 잡아 징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조선국인이 러시아 경계에 들어가 개간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조선에 금령을 내려야 한다고 하였다. 寧古塔 副都統의 보고에 의하여, 琿春協領 訥木津이 칙령으로 러시아와의 교섭을 위하여 摩闊 會晤 俄館에 가는 도중에 조선국 남녀 4∼50인이 계속 경계를 넘어가는 것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珠倫河를 경유하여 바닷가로 가고 있었는데, 그 내력을 물어도 언어가 통하지 않고 俄界여서 막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바로 비밀리에 沿海의 嚴杵河, 棘心河 등처를 조사하니 이미 천여 인의 조선인이 모여 살고 있고 계속 오는 자가 그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청 정부는 담당 부서를 경유하여 해 조선 국왕에게 알리고 변계관에게도 알리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는 조선의 수많은 유민들이 이 시기에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유입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1870년(고종 7, 동치 9)에는 조선 碧潼 관할 小坡兒鎭 지방에 游民이 나아가서  掠하고 民房 6∼70가를 燒 하고 모인 것이 700여 인에 이르러 戒鬪滋事하였다고 보고하고 양 측의 주민이 서로 다투지 않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조선과 청 사이의 완충 지대에 대한 이해가 서로 와해되어 가고 있었고, 동북 지역에 대한 청 중앙 정부의 봉금 정책도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시기라고 하겠다.

조선 측의 자문에 의하면, 이 시기에 慶源府 農圃社 居民 李東吉이라는 자가 혼춘 지방에 逃往하여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며 무뢰배들을 불러 모았는데, 조선의 民口가 犯越한 것은 모두 이동길이 招諭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琿春 사람들이 그와 친숙해져서 그를 고발하고 잡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과 청 사이의 이러한 완충 지대를 둘러싼 수 백 년에 걸친 외교적 교섭의 연장선상에서 1885년(고종 22, 광서 11)의 [乙酉勘界]와 1887년(고종 24, 광서 13)의 [丁亥勘界]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전통적인 화이 질서가 근대적인 외교 관계로 전환하는 시기이고, 청의 동북 지역에 대한 봉금 정책이 무너져서, 수 백 년간 조선과 청 사이의 완충 지대(무인 지대, 공광 지대)로 비어 있던 지역에 조선과 청의 유이민이 들어가 거주하면서 빗어진 결과라는 것을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3. 조선후기 朝·淸 변경의 인구 동향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중국의 동북 지역은 청 정부의 특별한 지역으로 봉금 정책에 의하여 관리되어 왔기 때문에 오랫 동안 인구의 변동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또한 인구 자료도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청 왕조 후기 동북 지역의 인구 동향을 간략히 검토해보자. <표 1>의 수치는 대체로 10년을 1개 단위로 하여 인구 증가를 비교한 것이다. 이 표에서 보듯이 청말 중국 동북 지역의 인구는 奉天 지역은 1812년 94만에서 1820년에 170만으로 증가하여 그후 1870년까지 약간의 증가율을 보일 뿐 크게 증가하지 않다가 1880년대에 들어와서 420만으로 격증하였다. 吉林 지역의 경우는 1812년에 30만에서 시작하여 1881년에 34만으로, 거의 변동이 없었다. 중앙 정부의 봉금 정책이 제대로 유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890년에 들어서면 48만, 97만으로 격증하고 1911년에는 奉天 지역이 1292만, 吉林 지역이 558만으로 거대 인구를 포용하는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위와 같이 중국 동북 지역의 인구는 19세기 말에 가서야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 쪽의 인구는 일찍부터 평안, 함경도 邊地에 대한 개발이 진전되었다. 즉 17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간 함경도 호구가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戶는 5%에서 7% 내외로, 口는 7%에서 10% 안팎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압록강변의 개발과 廢四郡 지역에 邑治가 설치되어 인구의 유입이 확대되었다. 함경도에서도 南關 지역(함흥 등) 보다는 北關 지역(길주, 경성 등)이, 북관 지역보다는 江邊 지역(삼수, 갑산 등)의 인구 증가가 현저하였다.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남관 지역은 0.17%의 인구 증가가 있었고, 북관 지역은 0.63%, 강변 지역은 0.77%의 인구 증가가 있었다. 인구의 북쪽으로의 이동 현상을 느낄 수가 있다.

<표 1> 19세기∼20세기 초반 중국 동북 지역의 인구


* 전거: {淸戶部淸冊}, {淸續通考} 등 자료(黑龍江省은 장기 인구 통계는 보이지 않고, 다만 {嘉慶重修一統志}에 167617口로 나온다고 한다).


한편 북관, 강변 지역에 들어간 인구의 이동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양국의 완충 지대에 들어가게 된다. 원래 공광 지대였던 이 지역이 양국의 단속이 느슨해진 것을 계기로 개간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아래 <표 2>는 20세기 초반 압록강 건너편 지역의 인구 현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長白縣과 臨江縣 등에는 인구의 상당 부분이 조선에서 들어온 주민들이었다.


<표 2> 20세기 초 압록강 연변 인구


압록강과 두만강 연변 지역은 중국 동북의 봉금 지역 중에서도 가장 먼 변경이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의 주민의 이주는 매우 늦은 시기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중국으로부터의 이주는 旗兵이 둔전을 개간한다든가 流民들이 사사로이 개간을 하는 것, 또한 변문의 경비 지역을 전진 배치하면서 유민을 모아서 개간하는 방식 등으로 이루어졌다. 청에서 조선과의 변경 지역에 행정기구를 둔 것은 매우 늦은 시기이다. 압록강 하류의 安東縣은 1876년(光緖 2)에 설치하였고, 다음 해에는 寬甸에 寬甸縣을 두었으며, 六道河에 懷仁縣(지금의 桓仁)을, 이어서 頭道江에 通化縣을 두었다. 이곳에 구획을 정하고 관서를 설치하여 매 현에 巡査 1원을 두어서 기록을 관장하게 하였다. 寬甸縣과 安東縣 및 邊內에 있었던 岫巖州는 鳳凰廳에 소속되어 통할되었고, 懷仁縣과 通化縣은 興京廳의 관할이었다. 압록강 상류의 臨江縣은 1895년에야 두어졌다. 盛京將軍 增琪會가 奉天府尹과 협의하여 臨江縣을 두고 興京廳에 소속시켰다. 1899년에는 東三省 총독 徐士昌이 또 長白府를 설치하여 臨江 동남쪽의 八道溝를 경계로 하였다. 八道溝의 동쪽은 長白府에, 溝의 서쪽은 臨江縣에 소속되었다. 따라서 臨江縣은 서쪽으로 五道溝에서 通化縣과 경계를 하게 되었다. 좀 장황하게 조선과 청의 변경 지대에 청의 행정 기구가 설치된 것을 설명하였는데, 이는 그 동안 무인지대 혹은 완충지대로 두었던 지역을 조선과는 협의 없이 중국이 자의적으로 행정 기구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러한 지역에 대한 개관과 거주는 청의 유민들보다는 훨씬 먼저 조선쪽의 유민들이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으로부터의 유민 개간은 이미 1897년에 通化市, 桓因縣, 興京市, 寬甸縣 등에 거의 8000천 여 호, 37,000여 인이 분포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따라서 1899년의 [韓中條約]에서도 변민으로서 이미 넘어와서 개간하고 있는 자는 안업하여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게 하고 앞으로 월변하는 자에 대해서만 피차간에 금지를 하자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봉금 시기의 변경을 넘어서 개간을 하고 있던 조선과 만주족 유민들은 스스로 자치 기구를 만들어서 하나의 행정 기구처럼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1872년 5월 30일에서 7월 15일까지 厚昌郡守가 崔宗範, 金泰興, 林碩根 등 3인의 정보원을 파견하여 조사 기록한 {江北日記}에는 강 건너 조선과 청의 변경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는 조선 유민 大會頭 金元澤의 지휘하에 조선인 277座의 戶와 1465명의 人丁, 胡幕 220座의 戶와 792명의 胡丁에 大銃 20자루, 胡銃 216자루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會上制'를 조직하여 수령은 '大會頭' '都會頭'리고 칭하고 民事와 兵事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밑에는 '會上'이 있어서 각 촌락을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일기에 보이는 '我人家'는 조선인이라고 생각되며 '胡幕'과 '戶丁'으로 표현된 사람들은 여진족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이 변경 지역에서 함께 동거하며 자급자족의 자위적 생활 영역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紅胡賊' 등 마적들의 비호 하에 伐採·蔘圃·淘金·狩獵 등 주요한 이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先入者들은 과중한 부역과 세금 수탈, 흉년 등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조선과 청의 유민들을 받아들여 그 동안의 조선과 청 사이의 완충 지역이었던 곳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조선 쪽의 유민들은 眞人과 勝地를 찾아 나서서 그 숫자가 매년 수 백, 수 천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조선의 유민들이 들어간 곳은 아직 청이나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3명의 정보원이 파견되기 1년 전에도 조선 측의 후창군수는 이들 마적 세력을 공격하여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였다.

 

Ⅱ. 맺음말


조선과 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배 질서 = 화이 질서(宗藩 관계, 朝貢 관계) 하에서 청은 동북 지역(만주)을 어떻게 지배하였고 그러한 질서 속에서 만주 지역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으며, 조선과 청은 변경은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가, 조선과 청 사이의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폭 120리에 이르는 변경의 완충 지역은 양측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또 이들 지역은 청 중앙 정부의 지방 지배력이 약화되고 봉금 정책이 해이해진 19세기 후반에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살펴보았다.

청의 봉금 정책에 의하여 조선과 청 사이에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 무인 완충 지역이 설정되어 있었고, 조선과 청은 이곳에 어떠한 사람도 거주할 수 없도록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청 측에서 책문의 경비 시설을 앞으로 전진 배치하려 하거나(展邊), 압록강 또는 토문강 건너편에 奸民들이 거주하려고 한 경우 또는 불법적인 인삼 채취나 수렵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양측이 서로 항의를 할 수 있었으며, 청 측의 행위에 대해서는 조선 측의 항의에 의하여 바로 중지되거나 철거되었으며 그러한 행위의 주모자들은 처벌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조선과 청 사이의 이러한 무인 지대에는 19세기 후반까지 거의 인구의 유입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쪽의 북변은 18세기 이후 꾸준히 개발이 진전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읍치가 두어졌다. 이러한 진전 속에서 북변 지역의 주민들은 19세기 후반 가혹한 부역과 흉년으로 眞人과 勝地를 찾아 강을 건너 봉금이 해이해진 양국의 변경 지역에 유입되게 된 것이다. 조선과 청 사이의 무인 지대에 유입된 유민들은 자율적으로 자위와 자립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이곳에는 19세기말 20세기초까지 조선과 청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마적 등에 의하여 통제되는 무법 지대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청일 간도협약의 무효와 한국의 간도영유권|작성자 yhkims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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