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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8-04 02:52
한국근대의 북방영토와 국경문제(학술대회 발표문)
 글쓴이 : 관리자 (118.♡.32.39)
조회 : 714   추천 : 0   비추천 : 0  

청일 간도협약의 무효와 한국의 간도영유권

노 영 돈(인천대 국제법 교수)


Ⅰ. 서  론


1. 문제의 제기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 중국 지방민족사의 일부로 삼으려는 소위 '동북공정'을 국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리나라는 뜨겁게 달구어졌었다. 그러나 좀 더 알고 보니 동북공정이 단순히 과거의 고구려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중국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는 장래의 땅과 사람에 관한 문제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즉 간도귀속문제와 재중한인들에 대한 지배문제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간도영유권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즉 두만강 또는 압록강 건너의 간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북방한계가 두만강-백두산-압록강선으로 한정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것은 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바이고, 그 이북의 일정한 지역인 간도지역까지가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과거 역사속에서 우리 나라 또는 민족이 한 때 지배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감상적 민족주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국제법의 관점에서 볼 때 간도가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법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국제법적으로 두 국가간의 국경의 획정은 그 두 국가간의 국경에 관한 유효한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질 때 비로소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국경에 관한 합의가 없거나, 합의가 있어도 그 합의가 유효하지 않다면, 그 국경은 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지 못한다. 이것은 비단 법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반적 상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바이다.


   우리나라와의 경우, 현재 중국과의 국경선인 양 되어 있는 두만강-백두산-압록강선의 국경형태가 형성된 것은 1909년의 청일 간도협약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 청일 간도협약이 법적으로 유효한 국경합의라면, 현재의 국경선은 장차 언젠가 한중 두 국가가(또는 두 국가의 승계국이) 새로이 유효한 합의를 하여 변경하지 않는 한 최종적이며 영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간도협약이 유효한 국경합의가 아니라면, 이 간도협약에 기초하여 획정된 현재의 국경선은 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고, 따라서 원칙적으로 그 이전에 유효하게 존재했던 국경선이 한중 양국의 국경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간도협약의 유효성을 따져봐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중국이 현재의 국경선이 유효하다고 하는, 달리 말해서 간도가 중국의 땅이라고 하는 법적 근거를 바로 간도협약에 두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중국측에서 내세우는 자신들의 간도영유권의 근거로는 ①간도의 영토를 누가 먼저 취득했는가의 측면에서 청의 태종이 차례로 이 지역을 정복하여 청의 판도에 편입되었고, 두만강을 경계로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 ②자연지세가 청에 편리하다는 것, ③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간주하고 경계조약인 1712년의 소위 백두산정계비가 토문강, 즉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하였다는 것, 그리고 ④소위 [청일 간도협약]에 의하여 간도영유권문제가 종결되었다는 것 등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국제법적으로 1909년의 간도협약이 과연 유효한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문제는 한중간의 간도영유권 귀속과 관련하여 국제법에 관하여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지만, 그러한 문제들 중에서 과연 그러한 문제들이 문제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선결적 조건이며 전제가 되는 것이다.

2. 한중 간도영유권분쟁 경위의 개관

   애당초 간도영유권문제의 당사국인 조선과 청간에는 국경이라는 것이 없었다. 조선과 청간의 국경이 처음으로 성립된 것은 1627년 정묘호란의 강화조약이었던 소위 [강도회맹]에 의해서였다. 강도회맹에는 "朝鮮國與金國立誓 我兩國已講和好 今後兩國 各遵誓約 各全封疆(조선국과 금국, 즉 청국은 약속하노니 우리 양국은 이미 강화에 합의하였다.

이후로 양국은 각각 약속을 준수하며 각각 경계를 봉하여 온전히 지킨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各全封疆'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 때는 양국간에 국경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구체적으로 어디로 경계를 정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강도회맹 자체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다른 사료들에 의해서도 지금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1638년에 청의 태종은 '남반'이라는 압록강 하류지점에서 '봉황성'을 거쳐 '감양변문(현재의 경흥과 회인)'을 지나 '성창문'과 '왕청변문'에 이르는 선에 防壓工事를 하였는데, 당시의 사정을 극히 단편적으로 남긴 淸 戶部의 기록은 新界는 舊界에 비하여 동쪽으로 50리를 더 전개하였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이전의 양국의 국경인 구계는 이 방압공사가 이루어진 '남반-봉황성(또는 봉성)-감양변문-왕청변문'선보다 50리 서쪽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압록강 이북과 두만강 이북의 상당한 지역이 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국경을 표시한 지도를 보면 압록강 이북의 봉황성 부근에서부터 북쪽으로 상당한 길이의 柵이 있고, 계속해서 그 위로는 城이 쌓여 있으며, '엽혁참'의 서쪽의 한 지점에서 동쪽으로 혼동강이 '역둔하'와 '낙니강'과 만나는 부근까지 책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지역까지는 표시가 없다. 그리고 이 이후부터 백두산정계비가 설치될 때까지는 양국간에는 국경문제에 관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한편 이 시기에 양국간에는 우리가 말하는 광의의 간도지방, 즉 청의 입장에서는 동북지방에 속인들의 출입을 막는 봉금령을 실시하여 이 지역을 무인지대화하였다. 봉금정책을 실시한 청측의 이유는 청이 명을 공격하여 점차 대륙의 중심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동화지성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경제발전이 저조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선측의 이유는 형제관계 또는 군신관계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었던 청의 요청도 있었겠지만 변방에서 양국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완충적 기능을 위해서 봉금정책을 썼던 것이다. 당시 동양에서는 선에 의한 국경선의 개념보다는 면에 의한 변방개념이 주로 통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봉금지대(무인지대, 완충지대 또는 間曠地帶라고도 한다)는 양국간의 변방이었고, 봉금령을 실시한 것은 이 변방에 양국이 취한 다소 구체적인 조치였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변방이 무인지대가 조선과 청의 어느 쪽에 귀속하는가는 당시로는 정해지지 않았다. 한편 이 봉금정책은 1867년 청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폐지되었고, 그 후인 1883년 조선에 의해서도 폐지됨으로서 200년간 유지되었다.


   한편 강희제에 이르러 청은 대륙을 통일하고 왕조의 극성기를 맞이하였고, 청조의 전성을 위해 고민하던 강희제는 그 동안 전해져오던 건국신화에 나오는 부쿠리(布庫里)산을 백두산으로 해석하고 백두산을 청조의 발상지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목극등을 파견하고, 목극등은 강희제의 명에 따라 백두산 천지를 청의 영토로 하기 위하여 백두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분수령을 찾아 국경을 삼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조선에 대하여 강압적으로 이를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 10리 되는 지점에서 분수령을 발견하고, 그 곳을 분계지점으로 정하여 1712년 5월 15일 비석을 하나 세웠다. 이 비석이 소위 백두산정계비인 것이다. 이 비에는 "오라총관 목극등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국경)을 조사하기 위하여 이곳에 이르러 살펴본 결과 서쪽으로는 압록강으로,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정하는 고로 분수령상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토문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어떤 지점에서 땅 밑으로 복류하여 어느 만큼 흐르다가 다시 땅위로 흘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송화강에 합쳐지므로 이 복류하는 지역이 땅위로 드러나 수류의 흔적이 있는데, 여기에 토퇴·석퇴를 쌓아 국경을 명확히 표시하였다. 이 공사는 장차의 국경과 관련한 분쟁을 없애기 위하여 청의 목극증이 조선에 지시하여 조선의 부담으로 축조된 것이다. 목극등이 강희제에게 제출한 복명서에도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정계비 설치시에 복류하는 지점에 쌓은 토퇴·석퇴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에 표시된 고지도는 많이 있다. 따라서 백두산정계비에 의할 경우 양국간의 국경은 압록강-백두산정계비-토퇴·석퇴-(송화강 지류인)토문강 선으로 확정된 것이고 그 결과 조선은 압록강 북편의 소위 서간도지방을 청에 빼앗긴 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과 청간에 간도영유권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된 것은 이로부터 160여년 후인 1883년이다. 그 핵심은 1712년 설치된 소위 백두산정계비상의 '토문'에 대한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이 정계비상의 토문강을 청측은 두만·도문·토문을 동일한 강이라고 주장하였고, 조선측은 토문강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송화강의 지류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그 사이의 간도지역, 즉 토문강의 동쪽과 두만강의 북쪽의 일정한 토성에 대한 영유권분쟁이 전개되었다.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양국은 1885년 을유감계회담과 1887년 정해감계회담을 가졌으나 청측의 강압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양국은 서로의 주장을 현실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하여 간도지역과 그 주민들에 대하여 각종의 조치들을 경쟁적으로 취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차례의 충돌을 빚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05년 소위 한일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해 갔다. 이를 근거로 대한제국을 대리한 일본은 1907년부터 1909년 사이에 청과 간도영유권문제를 위하여 북경에서 회담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이 회담의 초기부터 간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으나 1909년 그들의 대륙침략정책을 위하여 돌연 전략을 바꾸어 보다 교묘한 대륙침략을 위하여 간도가 청의 영토인 것으로 하는 소위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이하에서는 간도협약의 효력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Ⅱ. 소위 [청일 간도협약]의 체결과정

1. 일본의 '동삼성육안'의 제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장악을 강화하고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여 갔다. 이로 인하여 1906년 10월에 대한제국은 통감으로 와 있는 이등박문에게 공문을 보내어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의 보호를 의뢰하였다. 이러한 의뢰를 받은 일본은 1907년 8월 간도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는 한편 북경주재 일본공사를 통하여 청과의 간도영유권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청과 일본간의 회담은 1907년 8월부터 간도협약이 체결된 1909년 9월까지 2년여에 걸쳐 북경에서 청국정부와 일본 공사간에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일본도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였고 이를 위하여 일본이 제시한 근거는 지금보아도 상당히 치밀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이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고 주장한 데는 그것이 사실이어서 그런 것 외에도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즉 당시 그들의 대륙침략계획에 의할 때 실제 역사속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조만간에 대한제국을 합병할 것이 계획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로 확정될 경우, 일본은 대한제국의 합병만으로 간도도 당연히 수중에 넣게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간도영유권문제를 두고 청일간에 진행된 회담이 대립만을 거듭할 뿐 성과를 보이지 못하자 일본은 간도영유권문제만을 가지고 청과 논의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대륙침략정책이 차원에서 간도문제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만주전역에 관한 다른 현안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1909년 2월 6일 소위 '동삼성육안'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동삼성육안'이란 흔히 만주지방이라고 하는 청 동부의 3개 성, 즉 흑룡강성, 길림성, 봉천성(오늘날의 요녕성)에 관한 6개의 안이라는 것으로 ①만주철도의 병행선인 신법철도(신민둔-법고문간)에 대한 부지권문제, ②대석교-영구간의 지선문제, ③경봉철도를 봉천성 밑까지 연장하는 문제, ④무순 및 연대 탄광의 채굴권문제, ⑤안봉선 연안의 鐵務문제, 그리고 ⑥간도귀속문제 등이었다.

이 안은 전5안과 후1안으로 구분된다. 전5안은 청이 일본에게 인정할 사항으로 만주지역에서의 철도 또는 탄광 등에 대한 5가지의 이권을 부여하라는 것이고, 후1안은 그러면 그 대가로 일본이 간도영유권을 청에게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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